국내 시멘트 업체들이 한시름 놓게 됐다. 1조1800억원이란 천문학적인 담합 과징금이 부과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실제 과징금이 2000억원 수준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는 해당 기업들의 담합에 대해 심사하는 심사위원회에서 담합 기간을 짧게 본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이와 함께 라파즈한라시멘트가 대상에서 제외된 것도 전체 담합 과징금 규모를 줄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5일 쌍용양회공업·동양시멘트·성신양회·한일시멘트·현대시멘트·아세아시멘트 등 6개 시멘트 기업들이 시장점유율과 시멘트 가격을 공동으로 결정한 행위에 대한 과징금 1994억원을 부과했다.
◇ 담합기간 2011~13년만 인정
공정위에 따르면 공동(담합)행위를 한 6개 시멘트 기업의 영업본부장들은 시멘트 가격을 인상·유지하기 위해 2010년 하반기부터 모임을 갖고 2011년 2월 경 각 사의 시장 점유율을 정하고 이를 지키면서 출하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업계가 정한 점유율은 ▲쌍용양회 22.9% ▲동양시멘트 14.9% ▲한일시멘트 14.9% ▲성신양회 14.2% ▲라파즈한라 13.6% ▲현대시멘트 11.4% 순이다.
심사 과정에서 라파즈한라는 영업본부장이 해당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등 담합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인정되지 않아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를 제외한 기업들은 매달 2차례 이상 영업팀장이 모임을 갖고 시장점유율 준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멘트 출하량을 점검했으며, 점유율을 초과한 회사는 부족한 회사의 시멘트를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도록 하거나 선어음(나중에 물건을 받기로 하고 먼저 지급하는 어음) 발행 등으로 불이익을 줬다.
실제 6개 시멘트 기업의 영업본부장들은 2011년 3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시멘트 가격 인상을 합의했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가격 인상 폭이나 시기 등을 다르게 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는 게 공정위의 설명이다.
과징금은 해당 기업들이 공동행위를 통해 거둔 매출액을 기준으로 산정된다. 당초 공정위는 시멘트 기업이 약 5년 동안 담합을 통해 12조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린 것으로 봤다. 이에 역대 최다인 1조1800억원 규모의 과징금이 부과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공정위가 2014년 건설사들의 호남고속철 입찰 담합(3조5980억원 규모)에 대한 과징금 4355억원(매출액의 약 12%)보다 7455억원 많은 규모였다.
하지만 심사위는 이들 기업의 담합이 공정위가 담합 관련 조사를 시작한 2013년 4월까지만 이뤄진 것으로 봤다. 담합 기간이 짧아진 만큼 해당 행위를 통해 거둔 매출도 줄어들고, 여기에 부과되는 과징금도 크게 감소한 것이다.
과징금은 쌍용양회가 약 876억원으로 가장 많다. 심사위가 담합 기간을 인정한 2011년 3월부터 2013년 4월까지의 쌍용양회 시멘트 사업 매출을 기준으로 하면 매출액(약 1조7133억원) 대비 약 5.1%의 과징금 부과율이 적용된 것으로 추산된다. 한일시멘트와 성신양회는 각각 446억원, 437억원의 과징금으로 그 뒤를 이었다.
동양시멘트는 담합 행위가 인정됐음에도 실제 과징금 부과 대상에선 제외됐다. 판례(서울고법 2015년 5월 21일 판결)에 따라 담합행위가 회생절차 개시(2013년 1월17일) 이전에 성립해 과징금 청구권이 회생채권에 해당됐지만 신고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회생채권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하려면 회생절차 개시 후 일정 기간 내에 회생채권신고를 해야 한다"며 "하지만 당시에는 담합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라 회생채권신고를 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과징금을 부과할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전체 과징금 규모가 줄어든 데 대해선 “심사위에서 공동행위 기간을 제출보고서보다 짧게 판단하면서 해당 행위에 따른 매출액이 감소해 전체 과징금이 크게 줄었다”며 “과징금 부과 비율은 부과고시 등 법률에 따라 각 사마다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 2013년 4월 이후는?
이번 과징금 제재 조치에 대해 공정위는 “시멘트 제조사의 담합 행위를 엄중하게 제재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며 “해당 업체에 과징금을 엄중 부과해 재발 행위 방지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건설 등 시멘트 산업과 연관이 있는 업계에선 심사위가 판단한 담합행위 기간이 짧은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시멘트 업계가 담합을 통해 가격을 올렸고, 이후에도 가격은 담합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은 까닭이다.
공정위는 해당 기업들이 담합을 통해 시멘트 가격을 2011년 1분기 4만6000원에서 2012년 4월 6만6000원으로 1년 동안 43%를 인상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와 함께 대형 레미콘 기업들이 가격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들 기업은 2011년 5월 말부터 약 15일 동안 시멘트 공급을 중단하는 방법으로 가격 인상을 수용하도록 압박해 가격을 올렸다는 것이다. 레미콘 기업은 시멘트를 원료로 하기 때문에 을(乙)인 입장이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담합행위를 통해 인상된 시멘트 가격이 심사위가 판단한 2013년 4월 이후에도 유지됐으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며 “담합으로 오른 가격 상승분만큼 시멘트 기업들은 이익을 보는 반면 이를 원료로 쓰는 레미콘 기업이나 건설사 등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지난 2010년 톤 당 5만5600원이던 국내 시멘트 제품 가격은 2011년 5만7900원으로 올랐고 이후 꾸준한 상승세를 유지했다. 다만 지난해 상반기의 경우 전년보다 300원 줄어든 6만7800원을 기록했다.
이에 대해 한 시멘트 업계 관계자는 “2012년 정부 주도로 시멘트와 레미콘, 건설업계가 모여 협의를 통해 제품 가격을 정했다”며 “또 이번 공정위 심사에서 공동행위에 대한 기간을 평가한 만큼 현재까지 담합으로 제품 가격을 올려 이익을 본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