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미국 우선주의’가 현실화되고 있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덤핑관세를 부과하는 등 무역장벽이 높아지고 있어서다. 우리 수출품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미국이 주요 대미(對美) 무역흑자국인 중국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두 나라 사이에 낀 신세가 됐다. 미국이 우리 제품에 부과한 반덤핑관세 현황과 이유, 향후 대책 등을 알아본다. [편집자]
"몇 달 만에 관세율이 이렇게 널 뛸 수가 있나. 납득하기 힘들다. 미국 수출 비중이 큰 일부 기업은 존폐기로에 섰을 정도다." (철강업계 관계자)
지난 몇 년간 높아진 미국 무역장벽이 트럼프 정부 출범 후 더 강경모드로 전환됐다. 올들어 국내 기업들이 미국 반덤핑관세를 두들겨 맞은 게 벌써 다섯번째다. 더군다나 최종판정 관세율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설마' 하며 이따금씩 새어나오던 국내 기업들의 볼멘소리는 이제 비명으로 바뀌었다.
◇ 반덤핑 덫에 걸린 철강‧세탁기
미국 상무부는 2012년 한국산 세탁기에 대해 삼성전자 9.29%, LG전자 12.02%의 반덤핑관세를 부과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WTO에 제소했고, 2015년 '미국의 한국 세탁기 반덤핑관세는 협정 위반'이란 결과를 이끌어냈다.
미국은 집요했다. 이번에는 중국산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 가전기업들은 중국에서 생산된 국내 기업들의 제품이 덤핑으로 판매돼 자국 업체들이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올해 1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중국에서 생산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가정용 세탁기에 각각 52.5%와 32.1%의 반덤핑관세를 부과했다. 결국 반덤핑관세 부과라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지난달에는 변압기에도 반덤핑 관세가 부과됐다. 변압기의 경우 지난해 9월 재심 예비판정에서 현대중공업은 3.09%, 일진전기와 효성은 각각 2.43%, 1.76%의 낮은 관세율을 부과 받았지만 최종판정에서 뒤집어졌다. 현대중공업은 61%를 적용받아 충격에 빠졌다.
업계에선 미국 변압기 업체들이 자국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한국산 제품 대한 견제와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가 더해진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현대중공업은 미국 앨라배마주(州)에 현지 생산기지를 확보하는 등 사업을 확장하고 있어 타깃이 됐다.
철강은 반덤핑관세 규제를 받는 대표 제품이다. 포스코가 지난달 후판 제품에 11.7%의 관세를 부과받은데 이어 지난 11일에는 한국산 유정용 강관에도 예비판정보다 높은 관세율이 적용됐다.
유정용 강관은 원유나 천연가스 채굴에 사용되는 고강도강관 제품이다. 화석에너지를 강조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하에 원유 채굴 및 탐사가 활발해져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높은 관세율로 수출에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커졌다.
◇ 들쭉날쭉 관세율…고무줄 논란
국내 기업들은 일관성 없는 반덤핑관세율이 가장 큰 불만이다. 미국에서 반덤핑 여부가 결정되기까지의 조사(상무부와 무역위원회 동시 진행)는 예비단계와 최종단계로 나눠진다. 부과 기업에게 조사 결과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주는 연례재심(최초 조사와 동일한 절차) 제도도 있다.
국내기업들도 재심을 통해 덤핑 무혐의를 입증하거나 관세율을 낮추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오히려 최종판정에서 앞선 관세율보다 높게 책정되는 어이없는 일도 속속 발생하고 있다.
유정용 강관이 대표적이다. 2013년 7월 미국 철강업체들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9개국에서 만든 제품이 덤핑으로 수입돼 피해가 발생했다고 미국 당국에 제소했다. 특히 한국산을 향해 값싼 중국산 철강 제품을 수입해 가공한 뒤 미국에 덤핑으로 수출했다고 주장하며 중국산처럼 최고 99%의 반덤핑관세 부과를 요구했다.
첫 조사에서 상무부는 예비판정을 통해 우리 기업들은 반덤핑 혐의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자 미국 정치권이 반발했다. 예비판정을 번복해달라는 서신을 상무부에 발송하는 등 미국내 강경기류가 확산되면서 최종판정(2014년 7월11일)에서 우리 기업들이 반덤핑 관세를 부과 받았다. 당시 현대하이스코(現 현대제철에 흡수합병)는 15.75%, 넥스틸과 세아제강은 9.89%와 12.82%의 관세율이 매겨졌다.
우리기업들은 이에 불복해 재심을 요구했다. 하지만 혹 떼려다 혹을 붙이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지난해 10월 현대제철과 넥스틸, 세아제강 등은 기존보다 낮은 관세율이 적용돼 한숨을 돌리는듯 했으나 잠깐이었다. 최종판정을 받아본 결과 세아제강(2.76%)을 제외한 현대제철(13.84%)과 넥스틸(24.92%)은 더 높은 관세율이 부과됐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 출범 후 보호무역주의 강화의 역풍이 몰아친 것이다.
정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트럼프 정부 지지층에는 철강 등 제조업 노동자가 포함돼있고, 이들이 더 많은 일자리 창출을 원하고 있다는 점 등이 반덤핑관세로 나타난 것"이라며 "당분간 어떤 식으로든 강력한 보호무역주의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