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꿈꾸는 LG는 모름지기 세계 초우량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 최고를 성취해야겠습니다." -1995년 구본무 회장 취임사
20일 별세한 구본무 회장은 LG그룹을 글로벌 기업 반열에 끌어올린 경영자다. 회장으로 취임한 뒤 23년간 LG그룹 매출은 30조원에서 160조원으로, 해외매출은 10조원에서 110조원대로 뛰었다.
'럭키금성'을 'LG'로 바꿔 글로벌 기업으로 각인시킨 장본인도 구 회장이다. 그는 목표를 세우면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승부사'이자 재계 4위 그룹을 큰 잡음없이 이끈 '인화'의 경영자로 이름을 남겼다.
▲ 1995년 2월 LG그룹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본무 회장이 LG 깃발을 들고 있다. |
◇ 30조 회사를 160조 글로벌 기업으로
구 회장의 승부사적 기질은 골프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구 회장은 "내 골프 핸디는 고무줄 핸디"라며 "내기를 할 때는 잘하지만 그냥 칠 때는 잘 못한다. 딴 돈은 돌려주더라도 게임은 어쨌든 이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승부를 즐겼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선 불모지나 다름없던 2차전지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룹의 대표적인 먹거리로 키운 것도 이 같은 승부욕이 작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5년 2차전지 사업이 200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했을 때도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며 임직원들을 다독였다. 그 결과 LG화학은 국내 최초로 리튬이온배터리를 개발한데 이어 중대형 2차전지에서도 세계 최상위급 기술력을 갖춘 글로벌 회사로 입지를 다졌다. 지난해말 현재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수주잔고는 42조원에 달한다.
▲ 구본무 회장(오른쪽)이 2011년 2월 LG화학 오창 전기차배터리 공장을 찾아 생산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
◇ 세계최고 이끈 '집념'…전자·화학·통신 3각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투자에서도 그의 안목이 빛났다. OLED는 액정표시장치(LCD)와 달리 백라이트 없이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에 두께가 얇고 압도적으로 화질이 뛰어나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불린다. 구 회장은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기업들이 기술적 어려움으로 생산을 포기한 OLED TV 패널에 수조원대의 연구개발 투자를 승인, LG디스플레이가 대형 OLED 분야 세계 1위 자리를 거머쥐도록 했다. 현재 OLED는 경쟁이 치열해진 LCD시장을 대신할 블루오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회장 취임 직후인 1996년 이동통신시장 진출을 선언, LG그룹의 사업구조를 '전자·화학·통신서비스' 3개축으로 만든 장본인이 구 회장이다. 그는 통신 업계의 약자였던 LG유플러스를 시장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탈바꿈시키는데 주력했다. 1998년 매출 1조원이었던 LG유플러스는 데이콤과 파워콤 등 통신 3사 합병을 거치며 지난해 12조원대의 매출을 내는 종합통신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을 포기해야 했던 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외환위기 당시 LG그룹은 정부 주도의 빅딜로 반도체사업을 현대전자에 넘겼다. 구 회장은 빅딜에 반대했으나 청와대를 다녀온 뒤 마음을 접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현대전자는 채권단 관리 등을 거쳐 2011년에는 SK그룹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LG그룹은 2007년 발간한 'LG 60년사'에서 "반도체 빅딜은 한계사업 정리, 핵심 역량 집중이라는 당초 취지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 구본무 회장이 2014년 3월 연구개발성과보고회에서 LG전자 올레드 TV를 살펴보고 있다. |
◇ 남보다 앞선 지배구조…'인화의 힘'
구 회장은 그룹의 지배구조도 일찌감치 바꿨다. 거미줄처럼 얽힌 순환출자를 끊고 2003년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순환출자는 총수 일가가 적은 돈으로 계열사를 늘리는데는 유용했지만 어느 한 계열사가 무너지면 다른 계열사로 위험이 확산되는 문제를 갖고 있다. 지금은 신규 순환출자가 금지돼있다.
실제 2000년대 초반 SK그룹이 사모펀드인 소버린의 공격으로 경영권 분쟁을 겪을 때 LG그룹은 탄탄한 지주회사 구조로 소버린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낼 수 있었다.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구 회장의 선견지명이 계열사들의 안정적 경영활동을 이끈 바탕이 된 셈이다.
1999년 LG화재를 시작으로 2003년 LS그룹, 2005년 GS그룹, 2007년 LG패션 등을 차례로 계열분리하면서도 잡음이나 분란이 없었던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선대 때부터 맺어진 동업관계였지만 내 몫을 주장하지 않고 한발씩 양보하면서 대부분 '아름다운 이별'로 끝맺음했다.
특히 구 회장은 GS그룹 출범식에 직접 참석해 "LG와 GS는 한가족으로 지내며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함께 이겨내고 우뚝 설 수 있었다"며 "지금까지 쌓아온 긴밀한 유대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일등기업을 향한 좋은 동반자가 되어달라"는 축하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 구본무(왼쪽 두번째) 회장이 1995년 10월 허창수(세번째) 당시 LG전선 회장과 LG전자 평택공장을 찾아 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
◇ 놓칠 수 없는 두가지 '연구개발·인재'
초일류라는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가슴에는 인화를 품었던 구 회장은 마지막까지 연구개발과 인재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구 회장은 외환위기 때도 "경영여건이 어려워질수록 경쟁력 확보의 핵심이 되는 우수인재 확보와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는 더욱 과감히 집중해 강화해야한다"며 투자와 인재육성에 집착했다.
지난해 9월에도 수술과 치료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서울 강서구 마곡산업단지에 위치한 'LG사이언스파크' 공사현장을 직접 둘러봤다. 구 회장은 당시 임원들에게 "연구개발 장비도 최적의 제품을 갖추고 좋은 인재들을 많이 뽑아야 한다"는 당부를 남겼다.
LG사이언스파크는 4조원을 투자해 축구장 24개 크기인 17만여㎡(약 5만3000평) 부지에 연면적 111만여㎡(약 33만5000평) 규모로 지은 국내 최대 융복합 연구단지다. 구 회장은 이곳에서 '영속기업 LG'의 토대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했다.
▲ 구본무(왼쪽 세번째) 회장이 2017년 9월 LG사이언스파크 마무리 건설 현장을 점검했다. |
◇ 소탈한 재벌총수의 마지막 길
구 회장은 상대방을 만날 때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하고 지인 경조사 때는 비서를 대동하지 않고 홀로 가는 등 재벌 총수답지 않게 소탈하고 검소한 면모를 보인 총수로 알려져있다.
해외 사업장을 찾을 때도 현지 임직원들에게 "제가 이곳에서 환영 받고 또 LG가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멀리 타국에서 고생하고 노력해준 덕분"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그의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한 것도 자신으로 인해 번거로움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LG그룹측은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