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이 친환경 투자를 확대하고 법인세 인상 등을 담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을 통과시켰다. 하원 표결 이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서명 절차까지 완료되면 법안이 시행된다.
이번 법안 통과에 대해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표정이 밝진 못하다. 전기차 보급 확대를 위해 지원하는 보조금 대상이 미국에서 생산한 전기차로 한정되면서다.
현대차는 현재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지 않다. 미국 완성차 브랜드를 제외한 완성차 업계는 오히려 미국의 깐깐한 잣대를 맞춰야만 한다. 미국과 주요 동맹국에서 생산되는 원료로 배터리를 제조해야 하는 배터리 업계 역시 난감해졌다.
보조금 받으려면 미국서 생산해라
미국 상원은 지난 7일(현지 시각) IRA를 통과시켰다. 하원 표결 절차와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야 하는 등 행정적 절차가 남았지만 하원 절반 이상을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어 무리없이 통과될 전망이다.
IRA 핵심은 기후변화 대응 관련 정책이다. 총 예산 4300억달러(약 558조원) 중 85%가 투입된다. 전기차 구매시 보조금 7500달러(한화 980만원) 지급, 기존 업체별 제한하던 보조금 지급 한도(연간 20만대) 폐지가 골자다. 친환경차 구매 장려를 통해 미국 내 전기차 보급 속도를 높이겠단 구상이다.
하지만 보조금을 받기 위해선 깐깐한 선제 조건들을 만족해야 한다.
우선 미국 내에서 생산한 전기차만 보조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 내 전기차 생산 기지 구축이 필수가 됐다. 이미 미국 내 전기차 생산 공장을 둔 자국 완성차 브랜드가 경쟁 우위에 설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완성차 업체 중 미국 내 생산 기지를 둔 곳은 현대차그룹이 유일하다. 하지만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전기차는 아직 없다. 현대차의 전기차 아이오닉5와 아이오닉6는 각각 울산공장, 아산공장에서 생산 중이다. 이 상태라면 내년부터 아이오닉5와 아이오닉6는 미국의 친환경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지난 5월 발표한 조지아 전기차 전용 공장 설립은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했다. 현대차에 따르면 조지아 전용 공장은 2023년 착공에 돌입해 2025년 가동할 예정이다. 하지만 생산 능력이 본궤도에 오르기 위해선 이보다 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표면적으론 전기차 보급을 확대하겠다는 것이지만 결국 이미 전기차 전용 공장이 있는 미국 내 완성차 브랜드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라며 "현재 토요타, 폭스바겐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이번 법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K-배터리도 중국 의존 낮춰야
배터리 업계 역시 이번 법안에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전기차 보조금을 받기 위해선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채굴 및 제련한 배터리 광물 비중을 2024년 40%, 2027년 80%까지 확대해야 한다. 배터리에 장착되는 주요 부품 역시 북미 생산 비중을 2023년 50%, 2029년 100%까지 확대해야 한다.
문제는 전기차 심장이라고 불리는 배터리를 제조하기 위해선 대부분 중국 도움을 받아야한단 점이다. 현재 배터리 공급망 대부분을 중국이 장악한 상태다. 핵심 원료인 리튬의 70%가 중국에서 생산된다. 이번 법안을 두고 중국에 대한 견제 성격이 짙다고 보는 이유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한국 배터리 업체들도 흑연, 리튬 등 대부분을 중국에서 사오고 있다. 미국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기 위해선 이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상황이지만 쉽지 않다는 게 업계 측 설명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현재 배터리 원재료 제련 60~70%를 중국이 담당하고 있다"며 "배터리 공급망 자체를 중국이 선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향후 5년 안에 이 비중을 대폭 확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다른 배터리 업계 관계자도 "국내 배터리 업계는 그동안 중국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미국의 변화속도가 너무 빨라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IRA 법안이 우리나라 기업에 도움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장기적 관점에서 미국 내 친환경 정책 확대로 전기차, 배터리 등 시장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수혜를 입을 거란 설명이다. 미국이 중국에 견제구를 날리면서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바이든 대통령의 그린부양안으로 풍력, 태양광, 전기차, 배터리 산업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며 "미국의 그린산업 파트너인 대한민국 업체들에게 특히 유리한 여건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