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인공지능(AI) 의료기기 업계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올 3분기 주요 AI 의료기기 기업들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외형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들 기업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많다. 국내 AI 의료기기 시장이 포화 상태인 데다 건강보험 수가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아서다. 기업들은 해외 시장 공략,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 사업 진출 등을 통해 활로를 찾는 모습이다.
3Q, AI 의료 기업 성장세 '눈길'
1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올 3분기 국내 주요 AI 의료기기 기업 4곳 모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매출이 늘었다. 루닛은 3분기 연결기준 누적 매출 99억2328만원을 기록했다. 이는 역대 최고 실적으로, 3분기 만에 지난해(66억원)의 1.5배에 달하는 매출을 올린 셈이다. 연결기준 3분기 매출은 전년보다 4배가량 증가한 44억4563만원이었다.
뷰노의 3분기 연결기준 매출은 전년보다 167% 증가한 8억3459만원이었다. 누적 매출은 전년보다 89% 늘어난 19억4900만원을 기록했다. 제이엘케이 역시 3분기 연결기준 매출이 8억3183만원으로 전년보다 4배 가까이 성장했다. 같은 기간 딥노이드는 별도기준 9억2252만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지난해보다 50% 이상 늘어난 수치다.
이들 기업 중 영업이익을 내는 기업은 아직 없다. 대부분 국내 AI 의료기기 기업이 설립 이후 영업손실을 지속 중이다. 다만, 외형 확대에 힘입어 적자 폭은 감소하고 있다. 3분기 연결기준 루닛의 영업손실은 98억3765만원으로 지난해보다 적자 폭이 줄었다. 같은 기간 제이엘케이는 18억원, 딥노이드는 12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전년보다 적자 폭을 각각 5억원, 6억원 정도 줄였다. 뷰노의 영업손실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인 46억원이었다.
"성장성 높지만 국내에선 힘들다"
전 세계 AI 의료기기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AI 의료기기는 AI를 통해 질병을 진단하거나 헬스케어 솔루션을 개발하는 것이다. AI 의료기기가 질병을 조기에 정확하게 진단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면서 관련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시장조사기관 마켓앤드마켓에 따르면 글로벌 AI 의료기기 시장 규모는 지난해 69억달러(약 9조원)에서 2027년 674억달러(약 87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에서도 최근 3년 동안 AI 의료기기 기업이 1000억~2000억원대 기업가치를 인정받으며 코스닥 시장에 줄줄이 상장했다.
그러나 국내 AI 의료기기 기업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많다. AI 의료기기 업계에선 현재 국내 시장이 포화 상태에 가까워졌다고 보고 있다. 지난 8월 기준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은 AI 의료기기는 130개에 달했다. 특히 AI 의료기기 시장이 아직 초기 단계인 만큼 시장에 진입하려는 기업도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코어라인소프트 등 상장을 앞둔 기업도 많은 데다 구글, 애플,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외 정보기술(IT) 기업까지 AI 의료기기 시장에 문을 두드리는 중이다.
국내 시장에서 AI 의료기기 기업이 뚜렷한 수익 모델을 갖추기 어렵다는 점도 성장의 걸림돌로 꼽힌다. 의료법상 질병을 판단하고 치료를 결정하는 것은 의료진의 몫이다. 따라서 국내 AI 의료기기 기업들의 진단 사업은 대부분 의사의 진단을 '보조'하는 데 그치고 있다. 게다가 의료 산업은 보수적인 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 비대면 진료처럼 의료진의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도 높아 섣불리 사업 영역을 확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문제는 AI 의료기기의 역할이 보조에만 한정될 경우 국내 건강보험 수가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AI 의료기기를 통한 진단 같은 '새로운 의료행위'가 건강보험권에 진입하려면 해당 행위가 보조가 아닌 자체로 임상적 가치를 지닌다는 걸 입증,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의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하지 못하면 건강보험코드가 부여되지 않아 의료기관에서 신기술 의료기기를 써도 환자에게 진료비를 청구할 수 없다. 사실상 의료 현장에서 쓰이기 어렵다는 얘기다. 국내 AI 의료기기 기업이 내수 시장에서 유의미한 매출을 내지 못하는 배경이다.
'해외' 이어 'B2C' 시장 공략 속도
국내 AI 의료기기 기업들은 해외 시장 공략에 사활을 거는 모습이다. 루닛은 최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NSW) 정부의 '유방암 검진 프로그램(BSNSW)' 입찰에서 운영권을 획득했다고 발표했다. BSNSW는 NSW주 지역 내 40세 이상 여성에게 무료 유방암 검진권을 제공하는 호주 국영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적으로 국가 단위 암 검진 사업에 AI 기반 솔루션이 채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또 루닛은 후지필름, 필립스, 가던트헬스 등이 글로벌 기업과도 활발하게 협업하고 있다. 3분기 매출 중 해외 매출은 40억7600만원으로 해외 매출 비중이 지난해 41.8%에서 91.7%로 대폭 늘었다.
뷰노도 일본과 미국 등 해외 시장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뷰노는 올 초 일본 최대 의료 정보 플랫폼 기업 'M3'와 손잡고 의료 AI 전문 기업 'M3 AI'를 설립했다. 이를 통해 일본 현지 의료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는 구상이다. 제이엘케이도 최근 일본 후생노동성 주최로 열린 헬스케어 전시회에 참가, 일본 현지법인의 투자 유치에 나섰다. 딥노이드도 알리바바, 인텔, 노바티스 등 글로벌 기업과 함께 AI 상용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B2C 시장에 진출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루닛은 암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원스톱 토탈케어 서비스 '루닛케어'를 공식 론칭했다. 루닛케어는 암 환자와 보호자에게 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지원하는 서비스다. 뷰노는 가정용 심전도 측정 의료기기 'Hativ P30'를 통한 B2C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Hativ P30은 뷰노의 AI 기반 심전도 분석 소프트웨어를 탑재해 심방세동, 서맥, 빈맥 등 심전도 분석 결과를 제공하는 가정용 심전도 측정 의료기기다. 지난달 식약처 인증을 획득했다. 제이엘케이는 AI 기반 비대면 진료 플랫폼 '헬로헬스'를 앞세워 B2C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AI 의료기기 기업 관계자는 "국내 시장은 의료 체계상 AI 의료기기가 의료진의 진단을 보조하는 수단으로만 사용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고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하더라도 보험 수가가 너무 낮게 책정돼 안정된 수익 구조를 만들기 어려운 환경"이라며 "B2C 사업으로 캐시카우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장기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탄탄한 기술력과 차별화 전략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을 선점하는 게 필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