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으로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 쇼핑을 위해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고 계좌이체나 예적금가입, 대출 등을 위해 은행을 방문해야 했던 일상생활이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로 모두 가능하다.
언어장벽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다. 구글 번역기나 네이버 파파고로 전 세계 국가의 다양한 언어를 수초만에 번역해 언어가 낯선 국가에서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디지털전환(DX)은 우리사회 곳곳에 스며들었지만 예외적인 분야가 있다. 바로 원격의료다.
'삐뽀삐뽀119', 육아 필독서 된 까닭
"아이가 장염으로 구토와 설사에 시달려 발을 동동 구른 적이 있어요. 응급실이 있는 병원은 멀고 한밤중이어서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집 근처 소아과에 아이를 업고 달려갔습니다. 병원이 문 열기 전인 이른 시각이었는데도 줄이 있어서 1시간이나 기다렸어요"
올해 세 살 아들을 둔 이지은 씨(39)가 지난해 겪은 경험이다. 코로나로 병원은 환자들로 붐볐고 한참을 기다려서 진료를 보는 건 고작 1~2분이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라면 병원에서 오랜 시간 기다리는 건 누구나 한 번 쯤 겪어봤을 일이다. 특히 말 못하는 신생아는 왜, 어디가 아픈 지 파악이 어려워 더욱 조바심이 난다.
감기·피부병·소화불량·설사 등 신생아들이 걸리기 쉬운 질병을 중심으로 증상별 대처법을 상세히 담은 '삐뽀삐뽀 119'는 초판이 출간된지 26년 지나도록 육아 부문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다. 삐뽀삐뽀가 육아 필독서가 된 건 급할 때 의존할 수 있는 우리집 의사선생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이버 육아 커뮤니티에는 최근 삐뽀삐뽀로 아이의 요로감염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삐뽀삐뽀의 흥행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의료진과 대면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 비단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의 고민만은 아니다. 도서 산간지역은 병원과 거리가 멀어 이동하면서 더 많은 시간 통증을 감수해야 한다. 이동이 불편한 고령자와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장소·시간 제약없는 '비대면 진료' 곧 종료
"두피가 아프고 탈모 증상이 심했는데 회사 일이 바빠 병원 갈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어요. 점심시간 때도 직장 근처 병원은 인산인해라 진료받을 수가 없거든요. 비대면 진료 앱으로 진료 예약, 상담하고 탈모약 처방을 받았는데 마냥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좋더라고요."
네이버의 한 블로거가 비대면 진료를 이용한 후기다. 코로나 확산으로 지난 2020년 2월부터 비대면 진료가 일시적으로 허용되면서 굿닥·닥터나우·똑딱 등 헬스케어 플랫폼 기업들이 비대면 진료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플랫폼은 모바일 앱으로 진료를 예약한 뒤 순서가 되면 전화, 영상통화로 진료와 의약품 처방전을 받을 수 있다. 24시간 진료가 가능하고 처방받은 의약품은 퀵이나 택배를 통해 집으로 배송받아 편리하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가 전화·화상통신을 통해 진료를 보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코로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비대면 진료가 허용됐을 뿐 의료법상 환자와 의료진이 정보통신기술(ICT)을 이용해 직접 진단·처방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정부는 오는 4월말에서 5월초 코로나 위기경보를 '심각'에서 '경계' 단계로 하향 조정을 추진 중인데 경계 등급으로 내려가면 그나마 이뤄지던 비대면 진료도 더는 할 수 없게 될 전망이다.
뒤처지는 의료분야 DX…해외로 발길돌려
우리나라는 전체 헬스케어 분야에 있어서는 디지털전환이 빠르게 이뤄진 국가 중 하나다. 국내 주요 대학병원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의료진이 컴퓨터에 환자의 임상진료와 관련한 정보를 입력해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전자의무기록시스템'을 도입했고 의료기기 회사와 바이오텍들은 디지털 치료제와 웨어러블 기기를 속속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헬스케어 분야에서 유독 원격의료는 법률에 의한 장벽에 가로막혀 세계에 뒤처져 있다. 원격의료가 허용되지 않다보니 관련 기술을 보유한 국내 기업들은 자국에서 꿈을 펼치지 못한 채 해외에서 생존을 모색 중이다.
네이버 관계사 '라인(LINE)'은 일본의 의료정보 플랫폼 기업 'M3'와 합작회사인 '라인헬스케어'를 설립하고 2020년 12월부터 일본에서 모바일 메신저 라인을 통해 의사와 환자가 진료 상담을 할 수 있는 원격의료 서비스를 시작했다. KT는 현대중공업그룹의 모바일 헬스케어 솔루션 기업 메디플러스솔루션과 손잡고 베트남에서 원격의료 사업 진출을 준비 중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영국, 인도 등에서 갤럭시 스마트폰을 이용한 원격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공되지 않는 서비스다. 삼성은 또 미국에서 원격의료 기업 '헬스탭'과 국내에서는 헬스케어 플랫폼 기업 굿닥과 손잡고 올해 원격진료 서비스를 탑재한 스마트TV를 출시할 예정이다. 만약 국내에서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삼성전자 스마트TV의 원격진료 서비스는 국내에서 제대로 활용되기 어렵다.
'원격의료' 연평균 31% 성장…'제도화' 목소리
우리나라도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를 통한 원격의료의 포문을 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 세계적으로 원격의료에 대한 규제완화와 재정지원 등이 이뤄지면서 원격의료 시장이 급성장하면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7개국이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고 있으며, 세계 디지털 헬스케어 상위 100대 스타트업의 44%를 원격의료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또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GIA(Global Industry Analysts)에 따르면 글로벌 원격의료 시장은 지난 2020년 80억달러(10조원)에서 연평균 31% 성장해 오는 2027년 400억달러(52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원격의료를 확대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정부도 비대면 진료를 제도화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한시적 비대면 진료를 실시하면서 비대면 진료의 효과성과 안전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의료계에서 사전에 제기했던 상급병원 쏠림 현상이나 오진 등의 우려도 상당 부분 불식된 것으로 판단한다"면서 "환자의 의료 선택권과 접근성, 의료인의 전문성이 존중되고 환자와 의료인이 모두 안심하고 안전하게 비대면 진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보완 장치를 마련해 제도화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해외 각국이 ICT 기술을 동원해 환자의 의료 접근성 개선에 속도를 내는 만큼 충분한 기술력을 갖춘 우리나라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