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또다시 증권사 법인지급결제 허용을 둘러싸고 시끄럽습니다. 늘 그렇듯 포문은 증권업계에서 열었습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또다시 작심 발언을 한 것인데요. 황영기 회장은 최근 증권사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다고 밝혔고 공정거래위원회 제소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평소보다 톤을 더욱 높였습니다.
법인지급결제는 기업 자금이 지급결제망을 통해 지급되고 결제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업이 계좌를 통해 판매대금이나 공과금 등 각종 자금 이체와 수납업무를 하는 것인데 증권사의 경우 이런 법입지급결제 업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지난해에도 황 회장은 금융투자업계를 대표해 무던히 법인지급결제 허용을 요구했습니다. 지난해 7월과 연말에 이어 성토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는 곳은 없습니다. 법인지급결제망을 나눠가져야 하는 당사자인 은행권은 물론 금융당국도 일단은 한발 물러서 있는 상태입니다.
◇ 10년간 이어진 밥그릇 싸움..양측 주장 팽팽
증권사 법인지급결제 허용을 둘러싼 싸움은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어느새 10년을 묵혀온 사안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작은 2006년입니다. 당시 자본시장통합법에 증권사의 지급결제 업무 허용이 포함된 것이 발단인데요. 당시 은행권 반발에 부딪히면서 결국 소액결제시스템 허용만 논의됩니다.
25개 증권사들은 법인 지급결제업무 허용까지 감안해 산정된 3375억원의 결제망 특별참가금 비용까지 일찌감치 지불했지만 결국 개인을 대상으로 한 증권사 현금관리계좌(CMA)에 한해서만 지급결제를 허용하는 중재안이 마련되고 법인지급결제 허용은 차일피일 미뤄집니다.
그러다 2014년 말 정부가 2015년 경제정책방향에 증권사의 법인결제허용안을 포함시키면서 다시 기대감이 불붙었습니다. 2015년에는 당시 임종룡 금융위원장까지 나서 연내 해결을 보겠다고 했지만 결국 해를 넘겼고 지난해 8월 발표된 초대형 투자은행(IB) 육성방안 당시에도 법인 지급결제 허용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했지만 결국 포함되지 않으면서 금융당국은 슬쩍 발을 뺐습니다.
이 사이 증권과 은행 사이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양측의 변(辯)을 일단 한번 들어볼까요. 증권업계는 이미 증권과 은행업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이 법인지급결제망을 독점하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해 은행에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결국 허용한 것처럼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법인지급결제는 증권업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입장인데요. 기업금융을 주력사업으로 키우고 있는 증권사로서는 기업의 주요 금융사 역할을 통해 네트워크 확대는 물론 다양한 사업기회를 모색할 수 있습니다. 법인지급결제가 허용되면 증권사 IB 업무가 기업과의 연결 고리를 찾는데 더 수월해질 것이란 분석입니다.
반면, 은행은 증권업 특성상 유동성이나 결제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자신들의 고유의 업무라고 맞섭니다. 증권사는 은행과 달리 중앙은행으로부터 자금 공급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죠. 또한 재벌의 사금고화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단골메뉴로 등장합니다. 동양 사태라는 예도 자신있게 들이밉니다.
물론 증권업계는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한국증권금융을 통한 예탁금담보대출로 유동성 리스크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이미 금산분리가 철저한 상황에서 재벌의 사금고화는 어불성설이란 주장입니다.
◇ 도통 보이지 않는 해결의 실마리
사실 저금리로 인한 예대마진 축소에 인터넷은행까지 등장하면서 은행 산업의 먹거리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서 은행들이 본디 누려왔던 수익원을 나눠가지라는 것은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은행이 유독 핏대를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증권사에 법인지급결제를 허용하려면 내부 규약상 이를 금지하고 있는 금융결제원의 동의가 필요한데요. 금융결제원 이사회가 20여개의 은행이 추천하는 인사로 구성되면서 현재로서는 증권사 법인지급결제 허용은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습니다. 당국이 적극 나설리도 만무하지만 나선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닌 셈이죠.
이처럼 계속되는 답 없는 싸움은 언뜻 백년전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1337~1453년 사이 100년 넘게 벌인 전쟁이죠. 프랑스 영토 안에서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플랑드르 지방을 둘러싸고 사이가 좋지 않던 양국이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로까지 이어지면서 전쟁을 벌인 것이 결국엔 100년을 갑니다.
100년 사이 이들은 서로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인 싸움을 지속합니다. 이 시기에는 유럽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이 다녀가고 잔다르크라는 영웅이 탄생하기도 하죠. 결국 마지막에 프랑스가 노르망디에서 영국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후 영국이 물러나면서 백년전쟁은 막을 내리는데요. 오랜 시간의 전투 끝에 돌아온 것은 상처뿐인 영광이었습니다. 그나마 영국과 프랑스 모두 강한 왕권을 가지게 된 것은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내 집처럼 땅을 써왔던 은행 입장에서는 같이 나눠쓰자고 하면 당연히 반감이 큰 게 사실입니다. 증권업계 입장에서는 같이 땅을 써보라고 해서 이미 보증금까지 냈는데 중개인마저 미적거리니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죠.
백년전쟁이 오버랩되는 것은 그만큼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거 같은 불안감과 오랜 싸움 뒤에 그래도 뭔가는 얻게될 것이란 기대, 둘 모두 내포돼 있어서죠.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 당장은, 10년 싸움이 앞으로 10년은 족히 더 갈 것 같은 예감이 먼저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