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도 디폴트옵션의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퇴직연금=쥐꼬리 수익률'이라는 오명을 바꿔보고자 오랜 기간 도입을 추진한 끝에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됐습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든든한 노후 대비 수단이 하나 더 생긴 셈입니다.
디폴트옵션이란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가입자가 별도로 운용 방법을 설정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지정된 포트폴리오로 운용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확정급여형(DB)과 달리 DC형은 가입자 본인의 운용을 통해 퇴직자금을 관리해야 합니다.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보다 적극적인 투자가 가능한 셈이죠.
다만 DC형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그렇듯 생업에 바쁜 나머지 가입후 마냥 방치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흘러 자신의 퇴직연금 상태를 확인했을 때 수익률이 저조한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당연히 임금 상승률과 연동된 DB형보다 가입 유인이 떨어졌던 게 사실입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지난 19대 국회 때부터 정부입법을 포함한 다수의 관련 법안이 수차례 발의됐지만 소관 상임위인 환경노동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속 계류됐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디폴트옵션 도입을 골자로 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근퇴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장장 10년 만에 시행을 앞두게 됐습니다. 디폴트옵션이 도입되면서 그간 DB형 중심의 퇴직연금 시장도 DC형 가입자들이 주도하는 시장으로 변모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노후 대비에 대한 국민들의 높아진 의식 수준을 감안했을 때 단순히 돈을 묶어놓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운용할 여지가 크기 때문입니다. 퇴직연금의 입지가 확대되는 데는 매년 성장하는 퇴직연금 시장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0년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 통계'에 따르면 국내 적립금 규모는 2년 전 이미 255조원을 넘어섰습니다. 당시 확정 예산인 512조원의 절반에 육박할 만큼 덩치가 커진 셈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가지 아이러니한 부분이 눈에 띄는데요. 지난해 적격디폴트투자대상(QDIA)을 놓고 금융권과 옥신각신한 금융투자업계 직원들의 경우 정작 DB형 비중이 크다는 점입니다.
작년 국회에서 근퇴법 개정안 통과를 앞두고 증권·자산운용사 등 금투업계와 은행·보험 등 금융업권이 첨예하게 대립했었는데요. 바로 QDIA에 원리금보장상품 포함 여부를 놓고 충돌한 것입니다.
금투업권에서는 예·적금과 같은 원리금보장상품을 넣는 게 디폴트옵션의 취지에 맞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원리금보장상품이 포함될 경우 전향적인 수익률 개선이 힘들다는 게 금투업계의 판단이었죠.
금융업권에서는 금융소비자의 상품 선택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부당할뿐더러 주식시장이 안 좋을 경우 각종 송사에 휘말리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크다고 맞섰습니다. 대표적으로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원리금보장상품을 포함시킨 일본의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디폴트옵션 도입이 시급한 금투업계에서 한 발 물러서며 일단락됐는데요. 원리금보장상품이 퇴직연금의 수익률 개선을 저해한다며 대립각을 세웠던 금투업권 종사자들이 정작 DB형을 선호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어딘지 모순적으로 보이기만 합니다.
실제 금융투자협회에 보고된 국내 증권사들의 퇴직연금 현황을 발췌한 결과 자기자본 5조원 이상의 대형 증권사 5개사의 지난해 DB형 지원금은 895억원으로 집계됐습니다. 864억원의 DC형보다 31억원가량 많은 셈이죠. 대형 증권사 직원들이 DC형보다 DB형을 선호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들 증권사중 한국투자증권과 KB증권의 2021년 DC형 지원액 규모가 2020년보다 오히려 줄었습니다. 한국투자증권의 경우 127억원에서 119억원으로, KB증권은 68억원에서 58억원으로 축소됐습니다.
KB증권의 경우 지난해 연말 기준 DB형 지원액이 151억원으로 DC형보다 약 2.5배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DB형 가입자가 많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죠.
전체적인 수치가 집계되지 않은 자산운용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DB형과 DC형 지원 규모가 모두 확인되는 삼성자산운용의 경우 DC형이 9억원, DB형은 15억원 수준입니다.
물론 퇴직연금 유형 선택권은 가입자에게 있습니다. 금투업계에 종사한다고 해서 DC형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증권사 관계자는 "사실 회사 내부에서도 직원들이 DC형에 가입하는 것을 원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본인 결정이라 강제할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영업을 하는 일부 증권사 직원들, 특히 젊을수록 임금 상승률이 퇴직연금 투자 소득보다 클 것으로 판단해서 그런 것 같다"며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DC형 가입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DC형 확대를 주장하는 회사들의 직원들은 정작 DB형을 더 많이 선택하고 있는 상황. 그야말로 아이러니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