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그 의사에 반해 대표이사 및 사내이사직에서 해임될 경우 회사는 통상적인 퇴직금 이외 퇴직보상금으로 대표이사에게 200억원, 사내이사에게 100억원을 퇴직 후 7일 이내에 지급해야 한다"
코스닥 상장사 엔지켐생명과학이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승인한 정관 내용이다. 회사는 이 내용을 가결한 지난 3월31일 당일부터 이를 적용키로 했다. 한 마디로 대표나 사내이사를 자르려면 회삿돈 수백억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얘기다.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물러나는 경영진에 거액을 지급하는 이른바 '황금낙하산' 조항을 발동한 상장사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안정적 경영환경 조성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회장 자른다고 수백억 퇴직금…시장은 "과도하다"
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사 성신양회와 코스닥 상장사 엔지켐생명과학, 펩트론, 라파스, 인카금융서비스, 노터스, 퀀타매트릭스 등 총 7곳이 적대적 M&A 방지를 위한 황금낙하산 조항을 올해 신설하거나 강화했다.
수치상 보상금액이 가장 큰 곳은 엔지켐생명과학이다. 앞서 보듯 M&A에서 기존 경영진을 내보내려면 기본적으로 수백억을 깔고 가야 한다. 이 회사 사업보고서와 주총결과를 보면 사내이사는 손기영 회장을 포함한 4명으로 이들을 모두 해임하려면 최소 400억원이 든다.
엔지켐생명과학은 특히 KB증권이 최근 최대주주가 되면서 시장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 2월 추진한 주주배정 유상증자에서 대규모 실권주가 발생하자 대표 주관사인 KB증권이 이를 모두 떠안은 여파다. 당시 유상증자 530만주의 71.89%에 달하는 실권주 380만9958주가 그 해당분이었다.
이로써 지난 3월10일 엔지켐생명과학 신주 상장으로 KB증권은 지분 27.97%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후 KB증권이 지분을 부랴부랴 팔면서 현재는 18.78%까지 지분율이 내려온 상태다. 그러나 여전히 엔지켐생명과학의 손기영 회장 및 특별관계자(4.627%), 관계회사 브리짓라이프사이언스(7.44%) 지분을 합친 12.067%를 앞선다. 시장에서는 엔지켐생명과학 지분에 대한 평가 손실이 KB증권의 실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엔지켐생명과학의 이번 황금낙하산 도입이 KB증권의 제3자 매각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란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고려하더라도 경영진에 대한 보상 수준이 과도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황금낙하산 신설같은 정관 변경은 소액주주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안건인데 회사는 그 배경과 목적을 충분히 제시하지 않았다"며 "보상 규모 역시 수백억으로 과도하다는 점에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수백억 일시지급부터 수십배수 보상·성과급까지 '백태'
코스피 상장사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성신양회는 임기 도중 적대적 M&A로 해임된 대표이사(2인 이상이면 각각)에게 200억원, 각 이사에게 50억원을 해임 일주일 내에 지급한다는 조항을 올해 정기 주총에서 신설·가결했다.
코스닥 상장사 중에서는 퀀타매트릭스(대표이사 100억원·이사 50억원)와 노터스(대표이사 50억원·이사 30억원)가 비슷한 조항을 새로 만들었다. 이들 기업 모두 통상적인 퇴직금은 당연히 따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금액을 명시하는 대신에 누적 퇴직금의 수십배수를 보상액으로 규정한 상장사들도 있다. 코스닥 상장사 펩트론은 대표이사에 대해 근속기간에 따른 퇴직금 누계액의 20배를, 라파스는 사내이사에 대해 퇴직금의 20배를 2주 이내 지급하는 조항을 역시 올해 주총에서 추가했다.
인카금융서비스는 이들 상장사 가운데서도 통이 큰 편이다. 적대적 M&A에 따른 해임시 대표이사에 일시금으로 100억원을 지급하고 향후 3년간 결산기 영업이익의 20%를 추가로 주는 내용이어서다. 인카금융서비스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211억3356억원을 기록했다. 최근 3개년 평균은 128억6879억원으로, 이 금액의 20%만 따져도 25억원이 넘는다.
취지 감안해도 상법상 주주권한 충돌 소지…"투자 유의"
시장 전문가들은 경영권 방어를 감안하더라도 이들 황금낙하산 조항이 부실한 기업의 구조조정을 어렵게 하고 소액주주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지적한다.
남길남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기존 경영진에 수십억원을 지급해야 하는 금전적 부담을 회사가 떠안으면서 M&A 비용이 증가할 수 있다"며 "정관에서 퇴직위로금을 정했어도 그 금액이 회사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 상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주주들의 이사해임권한과 충돌할 가능성 또한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황금낙하산 조항 발동에 따른 상장사별 최대 지급금액은 평균적으로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의 4.2배, 시가총액의 27.4%에 달했다. 외부 자금을 투입하거나 자산을 매각하지 않고는 지급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인 것이다.
황금낙하산 조항이 이처럼 경영진에 과도한 특혜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은 주가로도 반영되는 모양새다. 올해 이를 새로 만든 상장사의 절반 이상이 내리막길 주가를 쓰고 있어서다.
엔지켐생명과학은 황금낙하산 조항을 신설한 이후 주가가 무려 27%나 빠졌다. 퀀타매트릭스와 성신양회도 이 조항을 만든 올해 주총 이후 각각 13.28%, 12%씩 급락했다. 펩트론은 다만 조항 추가 이후 낙폭이 1.34%에 그쳤다. 기존 주주는 물론이고 개인투자자의 주의가 요구되는 배경이다.
한지혜 한국지배구조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올해 황금낙하산 도입 등으로 기존 경영진의 경영권을 과도하게 보호하고 적대적 M&A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안건 비중이 작년보다도 확대돼 투자자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