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증권사의 신탁 범위 확대를 시사하면서 금융투자업계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당국은 그간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증권사의 수탁 가능 재산을 확대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무산된 바 있다.
그러나 새 정부 금융시장 정책의 방점이 규제 완화에 찍힌 데다 수탁 확대 범위 또한 이번에는 꽤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어 증권사 신탁시장이 한 단계 도약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는 평가다.
당국, 증권사 신탁 운용자율성 강화 추진
26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최근 금융규제혁신 추진방향에 신탁재산(투자일임재산) 범위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신탁의 운용 자율성 강화를 포함했다.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의 각론으로 분류된 이 내용은 시장 자율성을 확대하고 경쟁을 촉진한다는 취지가 강하다. 신탁가능재산이 너무 한정적이라는 업계의 애로사항 또한 반영됐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19일 금융규제혁신회의에서 "자본시장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투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다"며 "종합자산관리가 가능하도록 신탁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신탁은 투자자가 현금이나 증권, 채권, 부동산 등을 신탁업자인 금융회사에 맡기면 회사가 이를 운용해 이익을 내주는 제도다. 이번 신탁제도 개선과 관련해 당국은 이미 1차 검토를 마쳤다. 이에 현재 적극재산에 그치는 신탁업자, 즉 투자일임업자의 수탁범위를 소극재산이나 담보권 등으로 대폭 확대하는 안이 앞으로 중점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현행 자본시장법 시행령에 따르면 증권사를 비롯한 신탁업자의 수탁 범위는 △금전 △증권 △금전채권 △동산 △부동산 △지상권, 전세권, 부동산임차권, 부동산소유권 이전등기청구권 등의 부동산 관련 권리 △무체재산권(지식재산권 포함) 등 적극재산으로 제한돼 있다. 당국은 이처럼 한정된 신탁재산에 더해 부채 등 소극재산과 보험금 등으로 그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유언대용신탁 등 종합재산관리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현재 제한된 신탁가능재산의 범위를 늘려보자는 것"이라며 "증권사의 경우 특히 신탁 운용에서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완화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신탁법과 자본시장법상 차이로 가로막혔다. 앞서 2011년 신탁법이 개정되면서 신탁재산의 범위는 확대됐지만, 이게 최종적으로 자본시장법에는 반영되지 못했다. 당시 개정안에는 신탁 가능 재산의 확대 등이 포함됐지만, 국회 회기 종료 등으로 끝내 폐기됐다. 이후 2017년 금융위가 태스크포스(TF)까지 설치해 신탁업법 제정을 논의했지만 역시 흐지부지됐다.
신탁재산 작년에만 23%↑…신영 필두로 경쟁 가속
신탁시장의 성장세는 가파르다. 우리나라도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14% 이상)에 진입하면서 노년 및 사후 재산관리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금융회사에 맡겨진 신탁재산은 지난해 말 기준 총 1166조7000억원으로 전년 말보다 12.3%(127조6000억원) 불어났다. 이 중에서도 증권사 신탁재산은 같은 기간 251조1000억원에서 310조7000억원으로 23.7% 급증했다. 업권별로는 은행이 495조4000억원으로 가장 비중이 크지만 성장세는 증권사가 최근 5년새 62.1%에 달해 은행(39.1%)의 1.5배 수준을 나타냈다.
증권사들은 그간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금전신탁을 판매하면서 유동성이나 자금 관리 등을 해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개인투자자 유치에도 전력을 쏟는 모습이다.
현재 가장 적극적으로 신탁업을 영위하는 증권사는 신영증권이다. 이 증권사는 2017년 신탁 솔루션인 '신영 패밀리 헤리티지 서비스'를 출시하고 재산 승계와 부양, 종합자산관리, 자선기부 등으로 이뤄진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유언대용신탁과 증여안심신탁을 두 축으로 부동산 전문가와 세무사,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팀이 이를 컨설팅한다.
KB증권은 종합재산신탁 서비스인 'KB 인생신탁'을 이달 출시했다. 신탁으로 수탁한 재산에 대해 상속이나 증여, 후견 등 투자자의 니즈에 따라 맞춤형으로 설계해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유언대용신탁을 비롯해 증여관리신탁, 장애인부양신탁 등을 컨설팅하고 앞으로는 고령자를 위한 시니어헬스케어신탁, 미성년과 장애인 후견을 위한 복지형 신탁 등 비금융서비스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요즘에는 은퇴 이후에도 30년 이상을 살아야 하고, 노년층의 재산관리 수요는 계속 늘 수밖에 없다"며 "고액자산가들을 중심으로 신탁서비스를 넓혀가는 증권사 또한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