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최근 무차입 공매도를 저지른 메릴린치에 20억원의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한달 간 무려 5곳의 글로벌 IB를 불법공매도 위반으로 조치한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다음달 31일 공매도 전면 재개를 앞두고 그간 적발한 불법 공매도 제재조치에 속도를 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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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지난 26일 정례회의를 열고 메릴린치의 공매도 위반을 논의했다. 그 결과 중과실이 있다고 보고, 과징금 20억원을 부과하기로 의결했다.
이번에 메릴린치가 증선위에 상정된 사유는 무차입 공매도다. 자본시장법상 공매도는 원칙적으로 금지이며, 주식을 먼저 빌린 차입 공매도만 허용하고 있다. 메릴린치는 시장에서 대차가 가능한 종목 수량과 대차요율만 확인한 채 실제로 주식을 빌리지 않고 공매도 주문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증선위는 홍콩 현지 규정에선 이같은 방법이 위법이 아닌 상황을 고려해 메릴린치가 고의성이 없다고 봤다. 이에 따라 당초 금감원이 낸 원안보다 약 70~80% 감경해 조치를 결정했다.
당국은 불법공매도 전수조사 마무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증선위에 상정된 불법공매도 건은 2월에만 벌써 다섯 건에 달한다. 증선위는 지난 12일 노무라증권, UBS, JP모간, 모건스탠리 등 4곳에 160억원의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 불법 공매도에 과징금 제재가 가능해진 건 2021년 4월 이후부터다. 이후 당국은 2023년 3월 불법공매도를 저지른 ESK자산운용, UBS AG에 대해 첫 과징금 처분을 확정했다.
2023년 12월에는 BNP파리바와 HSBC의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무차입 공매도를 적발해 과징금을 내리는 동시에 검찰에 고발 조치했다. 이후 당국은 반복적인 대규모 불법공매도에 문제가 있다고 봐 대형 IB를 대상으로 전수조사에 나섰다. 이에 따라 적발된 크레디트스위스 계열사 두 곳은 작년 7월 27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는 불법공매도에 과징금 제도를 도입한 이래 역대 최고 수준이다. 작년 말에는 바클레이즈와 시티은행에는 183억원에 달하는 과징금 조치를 내렸다.
금감원은 오는 3월31일 공매도를 다시 전면 재개하는 시점에 맞춰 내달 중순까지 공매도 전수조사에서 적발한 글로벌 IB에 대한 조치를 완료할 계획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이 직접 '불법공매도 99% 차단 효과가 있다'고 자신한 전산화시스템이 가동되는 가운데 시장에서 불법 공매도가 얼마나 사라질지도 관심이 쏠린다. 이복현 원장은 지난 20일 증시인프라 토론회를 마친 후 브리핑에서 "과거 문제가 된 사례가 증권사 내 대차관리 시스템과 거래소의 무차입공매도 점검 시스템(NSDS)의 환류 기능을 통해 적발이 될 수 있음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전산화시스템을 갖추고도 불법 공매도를 저지를 경우 제재 수준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간 증선위가 무차입 공매도에 대해 고의성을 인정한 건 사실상 검찰 고발 조치한 BNP파리바, HSBC 뿐이다. 이밖에 적발된 건에 대해선 대개 착오나 과실로 처리됐다. 그러나 당국이 1년4개월에 달하는 공매도 금지 기간동안 글로벌 IB들을 대상으로 내부통제 강화와 전산시스템 보완을 거듭 주문한 만큼 적발시 고의성을 인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이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그동안은 한국 제도를 잘 몰랐기 때문에 불법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었지만, 반복 위반 사례가 나오면 고의성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글로벌 IB들이 금융위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결과가 변수로 남아있다. 일부 IB들은 감경된 처분에도 불복해 행정소송에 나섰다. ESK자산운용과 케플러쉐브레는 1심에서 금액산정이 과도하다는 점을 인정받아 과징금 처분을 취소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다.
금감원은 법원의 판단 사유를 향후 양형에 반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복현 원장은 지난 20일 "법원에서 위법하다는 판단을 내려줬다"면서도 "다만 행정소송에 있어서는 글로벌 실무나 최초 적발인 점 등을 고려해 과징금 규모가 너무 크다는 판단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원이 밝힌 기준을 포함해 증선위에 보고해야 할 것 같다"고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