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 KCGI가 최근 한진칼, ㈜한진 이사회에 전자투표 도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회사 측은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죠. 그런데 왜 KCGI는 다른 안건과 달리 전자투표를 주주제안이 아닌 이사회에 요구했을까요.
전자투표는 주주들이 주총에 직접 참석하지 않더라도 PC나 스마트폰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2009년 상법 개정을 통해 우리나라에 도입됐는데요.
다만 10년 전 도입한 전자투표는 말 그대로 제도만 도입한 것이고, 시행 여부는 회사의 자율에 맡기고 있는데요, 도입할지 말지 결정하는 주체는 상법상 이사회로 명시돼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전자투표는 제 아무리 지분이 많은 특정주주라도 주주제안을 통해 주총에서 표 대결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회사 이사회가 결정하지 않으면 못하는 겁니다.
# 대기업은 외면하는 전자투표
전자투표란 제도를 도입한지 10년이 흐른 지금. 상장회사의 전자투표 도입율은 약 59%에 달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제도가 많이 안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주목할 점은 전자투표를 도입한 상장사는 대부분 중소기업이라는 점입니다. 중소기업들이 전자투표를 적극 도입한 것은 전자투표와 맞물려 섀도보팅(중립투표)을 허용했던 정부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대기업이 전자투표를 도입한 비율은 그보다 훨씬 낮은 24%에 불과합니다. 대기업 4곳 중 3곳이 전자투표를 도입하지 않는 건데요. 그룹별로 보면 KCGI의 요구를 거절한 한진은 물론 삼성 LG 롯데 현대중공업 신세계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 계열사들은 모두 전자투표를 외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고로 전자투표보다 10년 앞선 1999년 국내에 들어온 서면투표(우편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방법)는 20년 역사가 무색하리만큼 더욱 도입율이 낮습니다.
전자투표나 서면투표는 모두 주총 현장에 직접 가지 않고도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열어놓자는 취지인데 왜 대기업은 이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작년부터 새도보팅(중립투표)이 폐지되면서 주총 의결정족수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는 우려가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말이죠.
의결정족수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려면 전자투표는 물론이고 주총날짜를 분산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 써도 모자랄 판인데도 대기업들은 전자투표를 외면하고 특정날짜에 주총을 몰아서 개최하는 모습이 여전합니다.
이는 중소기업과 달리 대기업들은 굳이 전자투표 없이도 의결정족수를 채우는데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비롯됩니다.
작년에 새도보팅 폐지되면서 의결정족수 미달로 주총안건이 부결된 상장사는 총 76개사. 이중 71개사가 코스닥이며 5곳 코스피상장사 가운데서도 4개사가 시가총액이 2000억원에 못미칩니다. 새도보팅 폐지로 인한 의결정족수 확보 문제는 일부 중소 상장회사에 국한한 문제이지 대기업들에게 당면한 문제는 아닌 셈이죠.
대기업은 주총 관심도가 높은 기관투자가들이 많은데다 기업자체적으로도 주총을 관리할 인적·물적 자원이 중소기업보다 여유가 있는 편이라 굳이 전자투표가 없어도 의결정족수 채우는데 사실상 문제가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과 무척 대조적입니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전자투표 도입 여부를 회사가 재량적으로 채택하도록 하고는 있지만 누가 주로 활용하는지는 사뭇 다릅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동경증권거래소 1부상장회사 중 시총 100억엔 이상 회사의 전자투표 가입률은 50% 미만이지만 시가총액 1조엔 이상 회사의 전자투표 가입률은 94.6%입니다. 시가총액이 높은 대형기업일수록 전자투표를 더 많이 채택하고 있는 것이죠.
# 국회에서 잠자는 전자투표법
전자투표는 발달한 IT기술을 기업경영에 접목시키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소수주주의 편의를 제고하고 주총 참석률을 높여 궁극적으로는 더 다양한 주주 의견을 경청하도록 문호를 개방하는 취지이죠.
설령 의결정족수를 채우는데 문제가 없다해도 상장회사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기구인 주총 참석률을 높이는 제도를 무작정 외면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회에선 상장회사들이 전자투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법안들도 발의돼 있습니다. 일정 주주 수 이상의 상장회사에 전자투표를 의무화하는 상법 개정안인데요.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 등이 각각 발의했습니다.
전자투표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는 법안은 재작년 2월 임시국회에서 여·야가 구두로 합의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다른 정치적 변수가 등장하면서 결국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이후에는 다시 국회에서 추가적인 논의가 없이 사실상 잠들어있는 상황입니다.
이외에도 전자주주총회를 허용해 온·오프라인 주총을 동시에 여는 법안도 아직 본격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인데요.
물론 전자투표나 전자주주총회 모두 제각각 가지는 한계도 있습니다만, 진정한 IT강국이라면 이제부터라도 내실있는 법안 검토를 시작해야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