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 대란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보완책이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 설익은 대책으로 인해 근로자들 사이의 형평성을 해치고, 세법의 근간을 무너뜨린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지난 21일 오후 전체회의를 열어 연말정산 수정 법안에 대한 심사에 착수했다. 지난 7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연말정산 보완대책은 새누리당 강석훈 의원의 입법안을 통해 국회에 제출됐다. 법안은 22일부터 열리는 조세소위원회와 전체회의 의결을 거쳐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다. 내달 5일까지 예정된 임시국회 회기 내에 본회의를 통과하면 근로자들은 5월 급여부터 추가로 연말정산 환급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본격적인 심사에 앞서 기재위가 작성한 검토 보고서에는 연말정산 보완책에 대한 의문부호가 붙었다. 단순히 근로자 541만명의 세부담만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 21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연말정산 보완대책을 담은 세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
#1. 5500만원 이하는 '성역'
정부는 연말정산 보완대책을 통해 2013년 세법 개정을 원점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총급여 5500만원 이하 구간 근로자의 세부담이 늘어나지 않도록 조정한 것이다. 관련기사☞ 연말정산 '뒷북' 대책..네 가지 시선
당장 법안이 통과되면 총급여 5500만원 이하 구간의 근로자 202만명은 연말정산 세부담 증가분을 환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다. 앞으로 총급여가 5500만원을 넘지 않는 근로자에게 세금을 더 받을 수 있겠냐는 걱정이다.
기재위는 보고서를 통해 "5500만원 이하 구간은 자칫 세부담 증가가 발생해서는 안되는 일종의 성역으로 인식될 것"이라며 "향후 근로소득세와 관련한 조세정책 추진에 있어 상당한 제약요인으로 작용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스스로 '증세의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2. 독신자 vs 대가족
무조건 총급여 5500만원 이하 구간만 서민 혹은 저소득층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세금이 같아야 한다는 '수평적 공평성'도 맞지 않고, 돈을 더 버는 사람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응능부담의 원칙(ability-to-pay principle)'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똑같이 연봉이 5000만원이더라도 갓 대기업에 입사한 독신 근로자나 고액 급여를 받는 배우자를 둔 맞벌이 근로자는 분명 담세력이 다르다. 배우자와 2명의 자녀를 둔 외벌이 가장은 오히려 세금 낼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기재위는 보고서에서 "보완대책은 가구별 인적구성이나 지출구조에 따른 실질적 담세력을 감안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세부담을 경감했다"며 "부양가족이 많은 7000만원 근로소득자가 5000만원을 받는 맞벌이 근로자나 미혼 청년보다 담세력이 높다고 보는 것도 타당성이 미흡하다"고 설명했다.
#3. 중복지원 없앤다더니
개정안을 보면 자녀에 대한 세액공제가 눈에 띈다. 3자녀 이상이면 2명을 넘는 자녀 1명당 공제액이 20만원에서 30만원으로 올라간다. 6세 이하 자녀가 2명이면 둘째 자녀부터 추가로 15만원을 공제하고, 출생이나 입양 신고한 자녀가 있으면 1인당 30만원을 더 공제한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제지원의 방향성은 괜찮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다만 중복지원 문제가 발생한다. 당초 정부가 발표한 2013년 세법개정안에는 6세 이하 자녀 추가공제와 출산공제를 폐지했는데, 이는 무상보육과 자녀장려세제(CTC) 도입과의 중복 지원을 막는다는 취지였다.
자녀세액공제를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소득공제 규정까지 함께 정비했는데, 여론이 악화되자 폐지한 카드를 다시 꺼낸 것이다. 정부 스스로 세제개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취지를 퇴색시켰다는 비판이 나온다.
▲ 출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
#4. 연금저축 해지하면 '낭패'
연금저축에 대한 공제도 늘어난다. 총급여 5500만원 이하인 근로자에 한해 연금저축 세액공제율을 12%에서 15%로 올려주기로 했다. 노후자금을 마련하는 근로자는 세액공제를 통해 연말정산에서 더 많은 환급을 기대해볼 수 있다.
만약 연금저축을 중도 해지한다면 15%의 세금을 내야한다. 세액공제율과 중도해지 원천징수 세율이 똑같이 15%인 경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총급여 5500만원이 넘는 근로자는 연금저축 납입금의 12% 세액공제를 받고도 중간에 해지하면 15%의 원천징수 세율을 적용한다.
연금저축에 100만원을 넣고 세금 12만원을 깎은 근로자가 중도 해지로 15만원의 세금을 내는 건 억울하다는 의미다. 중도해지에 대한 '패널티' 성격이지만, 급여 기준에 따라 근로자들의 형평성이 흐트러진다는 지적도 있다. 기재위는 세액공제율과 중도해지 추징세율의 균형을 맞추는 방안을 권고했다.
#5. 너덜너덜 누더기 세법
연말정산에서 최종 세금을 깎아주는 절차인 '근로소득세액공제'도 손질된다. 현재 총급여가 5500만원을 넘지 않으면 근로소득세액공제 한도가 66만원이고, 총급여 7000만원 이하는 63만원, 총급여 7000만원 초과일 경우 50만원으로 규정돼 있다.
여기에 총급여 3300만원 이하는 74만원, 총급여 4300만원 이하는 66~74만원으로 한도 기준을 추가했다. 저소득 근로자의 세부담을 줄이기 위한 개정이지만, 세법은 더욱 복잡해졌다. 가뜩이나 어려운 세법이 '누더기'처럼 바뀌면서 납세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공제한도를 5개 구간에 걸쳐 50만원, 63만원, 66만원, 74만원 등으로 규정한 것도 다른 세법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방식이다.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세법으로 고쳐야 한다고 기재위는 지적했다.
▲ 출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
#6. 소급의 딜레마
연말정산 보완책의 하이라이트는 '소급'이다. 올해 초에 실시한 연말정산 결과를 뒤집어 근로자들에게 세금을 돌려준다는 내용이다. 국민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리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지난 2013년 부동산 경기활성화를 위해 취득세와 양도소득세를 감면하는 방안도 정부가 먼저 대책을 발표한 시점부터 소급 적용했다. 2008년에 저소득층에게 나눠준 유가환급금도 대표적인 소급 사례로 꼽힌다.
그런데 이번 소급 적용은 논란이 뜨겁다. 정부가 뚜렷한 목표를 세워서 추진한 정책이 아니라, 근로자들의 불만을 수습하기 위한 땜질 처방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강하게 반발하면 세금 정책도 뒤집어진다는 선례가 남을 수도 있다. 당장 8월에 발표할 세법개정안에서도 정부가 '증세' 얘기를 꺼내기가 부담스러워졌다.
#7. 서류를 또 내라고
법안이 통과되면 541만명의 근로자가 국세청으로부터 4227억원의 세금을 돌려받게 된다. 다만 번거로운 절차가 남아있다. 개정안 부칙에 따르면 새롭게 바뀐 자녀세액공제를 받으려면 근로자가 직접 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연말정산을 또 해야 하는 셈이다.
근로자 입장에선 올해 초 연말정산 신고서 내용과 바뀐 것도 없는데, 다시 서류를 작성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가만히 따져보면 신고서 작성은 굳이 안해도 될 일이다. 이미 2월에 제출한 소득·세액공제 신고서에도 자녀의 수와 주민등록번호를 적었기 때문에 회사(원천징수의무자)가 자녀세액공제 여부를 가려낼 수도 있다.
부칙을 고치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다. 새롭게 도입된 입양공제를 적용받거나, 기존 신고서에 자녀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지 않은 경우에만 신고서를 제출하면 된다. 정부가 수천억원의 세금을 돌려주고도 욕 먹지 않으려면 근로자의 서류 제출 부담부터 덜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