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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삼 순성산업 대표가 순성안전연구소에서 충돌시험용 더미를 살펴보고 있다. |
공장 안의 연구소를 보여주겠다며 소파에서 일어난 이덕삼(59) 순성산업 대표가 먼저 챙긴 것은 빨간 목장갑과 전동 드라이버였다. 공장을 둘러볼 때 습관처럼 가지고 다니는 장비다. 연구소는 봉제실 옆 계단을 이용하도록 돼있다. 잠깐 들른 봉제실에선 누구하나 이 대표를 쳐다보지 않았다. "일할 땐 사장이 들어와도 인사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연구소에는 자동차 충돌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장비가 갖춰져있다. 레일 위에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순성에서 만든 카시트가 얹혀있다. 이런 시설을 도입하는데 10억원 이상 들었다고 했다.
순성산업 관계자는 "기존에는 시속 48km 속도로 충돌시험을 했는데, 더 가혹한 조건으로 변경하려고 설비업체와 논의 중에 있다"고 귀띔했다. 안전성을 높인 제품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순성산업은 최근 미국에서 더미(dummy·차량충돌 시험용 인체모형) 3개를 더 들여왔다. 6000만원 가량 들었다. 이 대표는 "(더미) 가격이 비싸다"며 투덜댔지만 얼굴엔 뿌듯함이 드러났다. 국내 카시트 제조업체 중 충돌시험장비를 갖춘 곳은 순성산업이 유일하다고 한다.
몇년전부터 엄마들 사이에 '순성카시트'로 유명해진 순성산업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설립됐다. 1980년대 중반까지 가내수공업 형태로 모기장을 씌운 유아용 요람을 만들었고, 이후에는 유아용 목마와 노래방 완구 등 주로 장난감을 만들어 팔았다.
지금처럼 카시트를 주력으로 생산한 것은 1999년부터다. 한해 매출은 150억원 가량이며,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30%대라고 한다. 카시트 하나로 삼성전자의 영업이익률(16%)보다 높은 실적을 낸 셈이다. 순성산업의 성공 비결은 뭘까. 이 대표로부터 순성산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들었다.
◇ "돈벌기 쉽다" 젊은날의 자만
-1952년 설립이면 꽤 오랜 역사인데,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순성산업은 어떤 회산가?
"원래는 유아용 요람과 모기장을 만들었다. 부모님이 1·4후퇴 때 내려와 할아버지와 함께 부산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1979년부터 이 일을 거들었고, 회사일을 본격적으로 맡은 것은 1986년이다. 농촌에서 일하러 나갈 때 아이들을 재우려고 여름 한철 쓰는 게 요람이나 모기장이다. 그걸로는 비전이 없다고 봤고 그래서 장난감 제조로 사업을 바꿨다. 많을 땐 완구 40여종을 만들었다."
순성산업은 1988년 리비아에 장난감을 수출했다. 리비아의 바이어가 우연찮게 국산 장난감을 봤고 주문을 해왔다고 한다. 서른 세살의 젊은이가 별다른 노력없이 50일만에 1억3000만원을 벌었다. 이 대표는 "그 땐 돈이라는 게 이렇게도 쉽게 벌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 3중고(IMF·수입완구·화재)에 무너지다
-지금은 완구사업을 안하는데…. 카시트만 하게 된 이유가 있나?
"IMF를 맞았다. 그 땐 제품하나 잘 만들겠다며 리스나 대출받아 설비투자했던 소기업들은 다 무너졌다. 무리하지 않고 땅이나 사서 갖고 있던 사람들은 별 타격이 없었고….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장난감 시장도 수입완구가 한참 들어오던 때다. 더이상 가짓수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카시트를 택한 건 그때만해도 남들이 잘 안다룬 품목인데다 일단 완구에 비해 크기가 컸다. 해외에서 화물로 싣고 오기가 어려운 제품이라 완구에 비해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봤다."
-그때부터 성장곡선을 그린 건가?
"사람이 안되려면 우스운 꼴을 당하기 마련인데 그 때 그랬다. 1997년 10월16일 성수동 공장에 불이 났다. 빗물이 새면서 합선됐고 스티로폼에 포장된 장난감들이 불탔다. 나중에 알고보니 공장건물 지을 때 시공사가 바뀌었던 곳이더라. 또 평수를 넓히려고 베란다가 있어야할 자리를 불법개조해 공장 공간으로 만들어, 빗물이 들이치면 전기와 합선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부동산중개인 말만 믿고 계약했는데 속았지. 그땐 공장이 불타고 IMF도 맞고 여러모로 어려웠다. 이후 카시트 개발에 나섰는데 좋을 때 시작했으면 그나마 낫겠지만 어려울 때 하다보니 2000년 4월20일 부도가 났다. 돈줄이 막히니까 어쩔수 없더라."
이 대표는 날짜를 얘기할 때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정확히 몇년 몇월 몇일 식으로 말했다. '1억원 남짓'이라는 말 대신 '1억3000만원', '1000여평' 대신 '1350평' 등 구체적인 숫자를 얘기했다.
◇ 우연히 본 현수막 한장에…
-재기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제품은 이미 만들어져있었기 때문에 매출만 발생하면 됐는데 부도 처리됐다. 폐를 끼치긴 했어도 남에게 동전 한 닢 떼어먹은 건 없다. 100% 다 갚았다. 성수동 공장도 내가 원상복구 해주고 나왔다. 부도는 냈지만 신용까지 버릴 순 없었다.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3가지가 따라야한다. 첫째는 노력이고 둘째는 주변 사람이 도와줘야한다. 셋째는 운이다."
-재기과정을 자세히 얘기해달라.
"우연찮게 강남경찰서에서 만드는 현수막 한장을 봤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거나 카시트를 설치하지 않으면 단속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청에 문의했더니 사실이라더라. 그 말 한마디에 카시트에만 더 매달렸다. 당시 카시트용 플라스틱 사출물 2만개가 있으면 되겠다 싶었다. 경기도 광주의 협력사를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더니 임가공 공임을 2500원에서 2000원으로 깎아주고 납품대금도 3개월 늦게 받겠다고 하더라. 또 일본의 고급원단을 구하러 다녔는데 한 사장님이 '자네같은 사람 도와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2년동안 팔 수 있는 원단을 한번에 줬다. 평상시 신뢰를 쌓아놓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새삼 느꼈다. 고마웠던 분들이다. 남들은 경찰청 발표 뒤에야 준비했지만, 우리는 미리 준비한 덕에 도소매상들이 우리에게 달려왔다. 석달새 8억원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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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성산업의 공장 전경. 계단식으로 이뤄진 부지 위에 공장이 들어섰다. 공장 전체는 7개동으로 이뤄져있다. |
◇ "사업은 두마리 토끼 잡는 것"
순성산업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 일대는 야산이었다. 이 대표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손을 뗀 부지를 사들여 직접 공장부지를 조성했다. 현재의 공장부지를 제외한 다른 부지는 매각해 개발차익도 챙겼다. 평당 60만원에 산 땅이 팔 땐 160만원 가량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번 돈은 순성산업이 공장을 증설하거나 연구소를 만들 때 쓰였다. 이 대표는 "사업은 두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이라고 했다.
-이젠 카시트도 대중화됐다. 비싼 것도 있지만 10만원 이하의 싼 것도 있고… 순성카시트의 차별화 포인트는 뭔가?
"기능과 원가, 편의성 등 다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안전이 먼저다. 우리가 사출과 봉제를 직접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예를 들어 사출작업의 경우 똑같은 제품인 것 같지만 작업자나 온도, 작업조건에 따라 200g씩 차이가 난다. 하청을 주면 고른 품질이 나오기 어려워 우리가 직접 한다. 또 200g이면 제품하나의 원가가 400원 가량 왔다갔다 한다. 그런게 300개라면 12만원 차이가 나는 거고…. 하청업체 입장에선 원가를 아끼려고 무게를 줄이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봉제도 비슷하다. 하청을 줘 빨리 해달라고 하면 바느질 간격이 넓어지는 등의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나는 직원들에게 실밥하나 없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우리가 직접 봉제작업을 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덕에 반품률이 0.1% 이하로 유지되고 있다."
◇ 안전에 대한 집착, 주먹구구 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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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차를 몰고 순성산업에 도착했을 때 순성의 공장문은 훤히 열려있었다. 경비원도 보이지 않았다. 조립동 앞을 지나던 한 직원이 다가와 '어떻게 오셨냐'며 묻는게 전부였다. 이 대표에게 '경비원이 없냐'고 물으니 "여기 있잖아요"라며 자신을 가리킨다.
이 대표의 숙소는 공장 사무실 2층에 있었다. 그의 가족들이 사는 집이다. 그는 "부도 나서 컨테이너에 살 때보다 낫죠. 일하는 곳도 가깝고…"라며 싱그레 웃었다.
-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달라.
"이제는 주먹구구로 사업하던 시기는 지났다. 그렇게 하면 쓰러진다. 스테인리스 그릇를 만들 때도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넥타이 매고 작업하는 시대다. 중국의 저가제품 때문에 못해먹겠다면 기술력을 키워 대응할 생각을 해야 한다. 구닥다리처럼 시끄러운 소리내며 작업장을 어지럽히고, 그렇게 일하던 시대는 끝났다. 순성이 매출은 작아도 이익률 자체는 높은 회사다. 그 덕에 은행에서 돈갚으라는 얘기는 안듣고 산다. 번 돈으로 투자를 늘릴 생각이다. 공장을 지으려고 인근의 야산부지도 매입해놨다. 직원수가 지금은 70명 정도지만 내년에는 100명을 넘길 생각이다. 마진이 좀 줄더라도 카시트 아이템을 늘려 인지도도 키우고 수출도 더 많이 할 생각이다."
현재 순성산업에는 이 대표의 자녀가 일하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자녀까지 4대가 순성에 몸담은 셈이다. 이 대표는 "내 세대만 해도 뿌리내리기 위해 '몸'으로 뛰는 게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꼼꼼히 사업을 챙기는 '머리'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라며 "다행히 (자녀가) 그 역할을 잘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 순성산업의 카시트 안전연구소 소개 동영상. 순성은 이 같은 시설을 갖추는데 10억원 이상 투자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