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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한끗]①'자전거방 주인' 꿈과 바꾼 죠리퐁

  • 2022.03.08(화) 06:50

1972년 첫 출시…올해로 50년
미국식 시리얼의 한국식 재해석
뻥튀기에서 착안…'밀쌀'로 제조

/그래픽=비즈니스워치

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서 사랑받고 있는 많은 제품들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그 한 끗 차이가 제품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비즈니스워치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에 숨겨져 있는 그 한 끗을 알아봤습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함께 찾아보시죠. [편집자]

'죠리퐁'은 '좌절'이었다

어린 시절 '죠리퐁'은 늘 제게 좌절감을 안겨주던 과자였습니다. 과자에 무슨 거창하게 좌절감까지 들먹이냐고 하시겠지만 제게는 그랬습니다. 양껏 먹고 싶어 작은 손으로 한 움큼 집어도 입에 넣을라치면 늘 손 밖으로 흘리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 탓에 실제로 입안에 들어가는 양은 적었습니다. 봉지째 입에 대고 털어도 봤습니다만 역시 손실이 더 컸습니다. 죠리퐁을 떠올리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죠리퐁을 양껏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우유'에 말아 먹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우유와 함께 하면서 죠리퐁에 대한 작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거 시리얼인데?'. 미국 사람들이 아침으로 먹는 시리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습니다. '죠리퐁의 시작은 시리얼이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의 시작은 그때부터였습니다.

현재 판매 중인 죠리퐁의 모습. 올해로 출시 50년째를 맞는다. / 사진제공=크라운제과

죠리퐁은 1972년 처음 세상에 나왔습니다. 올해가 출시 50년째입니다. 50년간 판매됐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자들이 꾸준히 찾았다는 방증입니다. 작년 기준 누적 매출액은 7512억원에 달합니다. 판매량은 50년간 약 20억5000만 봉지가 팔렸습니다. 국민 1인당 평균 39.7봉지의 죠리퐁을 먹은 셈입니다. 놀라셨죠? 죠리퐁은 알게 모르게 우리 곁에 무척 가까이 있었던 스낵입니다.

죠리퐁은 제조사인 크라운제과는 물론 국내 스낵 업계에도 무척 의미가 있는 제품입니다. 죠리퐁을 처음 생산한 크라운제과의 전신은 고(故) 윤태현 크라운제과 회장이 1947년 서울 중림동에 문을 연 '영일당제과(永一堂製菓)'라는 빵집입니다. 윤 회장은 당시 처음으로 식용 글리세린을 바른 팥빵을 선보여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식용 글리세린을 활용해 보관 기간을 늘리고 빵에 윤기를 더한 것이 성공 비결이었습니다.

팥빵이 성공을 거두자 윤 회장은 신제품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미군이 먹던 비스킷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산도'입니다. 비스킷 사이에 크림을 넣은 산도는 선풍적인 인기를 끕니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상품이었습니다. 크라운제과가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이 산도 덕분이었습니다. 산도의 탄생 과정은 과거 큰 인기를 끈 '국희'라는 TV 드라마의 소재로도 사용됐습니다. 

'산도'에 '루트 세일'을 입히다

산도의 성공으로 크라운제과는 계속 성장합니다. 이에 따라 윤 회장은 회사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큰 아들을 회사로 불러들입니다. 그 큰 아들이 바로 현재 크라운해태제과의 회장인 윤영달 회장입니다. 당시 윤영달 회장은 연세대 물리학과에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물리학도답게 기계 다루는 것이 능숙했던 윤 회장의 꿈은 자전거방 주인이었죠. 그러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1969년 크라운제과에 합류합니다.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겁니다.

미국에서 귀국한 윤영달 회장은 당시 크라운제과의 핵심 상품이었던 산도의 판매 확대에 주력합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제과 시장은 해태와 동양제과(현 오리온)가 꽉 잡고 있었습니다. 산도가 아무리 잘 팔려도 이들 업체의 마케팅력을 따라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도 산도를 매대의 전면에 올려놓지 않았죠. 이를 직접 목격한 윤영달 회장은 제과 업체들의 납품 시스템에 주목합니다.

1956년 출시 당시의 '크라운 산도' / 사진제공=크라운제과

그때만 해도 제과 업체들은 도매상을 통해 소매점에 제품을 공급했습니다. 도매상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윤영달 회장은 이를 바꿔놓기로 마음먹습니다. 당시 코카콜라가 직접 물건을 소매상들에게 납품하는 것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윤영달 회장은 '이거다' 싶었습니다. 직원 몇 명과 직접 전북 전주로 내려갑니다. 트럭을 살 돈이 없어 리어카를 끌고 소매상들에게 직접 물건을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소매상들도 윤영달 회장의 정성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죠.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물건을 납품받겠다는 곳들이 늘어나자 윤영달 회장은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공급 방식을 전면적으로 도입합니다.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소매상에게 직접 물건을 납품하는 방식인 '루트 세일'을 업계 최초로 적용한 겁니다. 덕분에 산도의 판매량도 급증했죠.

아버지의 '산도', 아들의 '죠리퐁'

산도가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크라운제과에게는 후속타가 필요했습니다. 언제까지 산도에만 기댈 수는 없었습니다. 윤영달 회장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산도의 인기를 이을 제품 개발에 골몰합니다. 그러다 문득 미국 유학 시절 미국 사람들이 아침으로 즐겨먹던 시리얼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식사 대용으로 충분한 맛과 영양을 담은 과자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국식 시리얼을 만들 기술력과 자본이 없었습니다. 그때 윤영달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국민 간식 뻥튀기였습니다. 뻥튀기 원리를 이용해 곡물로 시리얼과 유사한 형태의 스낵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한 겁니다. 결심이 선 윤영달 회장은 미친 듯이 뻥튀기에 몰두합니다. 쌀, 옥수수, 보리, 팥, 밀, 율무 등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각종 곡식을 튀기기 시작했습니다.

크라운제과 옛 본사의 모습 / 사진=크라운제과 홈페이지 캡처

사무실에 뻥튀기 기계 6대를 놓고 매일 각종 곡물을 튀겼습니다. 시리얼 형태의 스낵에 최적화된 형태와 맛을 구현하기 위해서였죠. 밤새 뻥튀기 기계를 돌리다가 사무실 절반을 태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튀긴 끝에 최종 낙점을 받은 것이 바로 '밀쌀'입니다. 하지만 밀쌀은 튀기면 쌉싸래한 맛이 납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당액'을 개발, 튀긴 밀쌀에 입혀 건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죠리퐁'입니다.

튀긴 밀쌀에는 배추 한 포기와 토마토 3~4개에 해당하는 식이섬유와 단백질이 들어있습니다. 윤영달 회장이 원했던 맛과 영양을 모두 갖춘 스낵에 최적화된 제품인 셈입니다. 윤영달 회장은 죠리퐁 개발에 성공하자 대량 생산에 돌입하기로 합니다. 평소 기계에 관심이 많았던 윤영달 회장은 뻥튀기 기계 원리를 바탕으로 소형 수동 '퍼핑 건(Puffing Gun)'을 직접 제작, 생산 라인에 활용했습니다.

'죠리퐁' 날다

죠리퐁의 원래 이름은 '조이퐁'이었습니다. '기쁨'이라는 의미의 'joy'를 썼습니다. '퐁'은 뻥튀기 소리를 가져온 겁니다. 그래서 조이퐁으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미 조이퐁이 상표등록이 돼있는 겁니다. 포장지 인쇄 돌입 직전에 확인한 터라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조이퐁과 비슷한 '죠리퐁'으로 지었습니다. '행복한, 쾌활한, 즐거운'이란 의미의 '죠리(jolly)'로 바꿨죠.

죠리퐁은 당시로서는 고가(高價)의 과자였습니다. 산도 6개 한 묶음이 30원, 뻥튀기 한 봉지가 30원이던 시절 죠리퐁은 한 봉지에 50원이나 됐습니다. 그럼에도 도매상들이 현금을 싸 들고 공장에 줄을 서면서까지 사갈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죠리퐁은 당시 미국의 시리얼을 본뜬 한국 최초의 '선진국형 스낵'이라는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들의 눈과 입맛을 사로잡았던 겁니다. 

1972년 출시 당시의 '죠리퐁'. 소형은 10원, 대형은 50원에 판매했다. / 사진제공=크라운제과

사실 죠리퐁이 전국구 스타가 된 데에는 주한 미군들의 힘이 컸습니다. 당시 우리 소비자들에게 기름에 튀기지 않고 고온고압으로 곡물을 순간적으로 팽창시킨 퍼핑 스낵은 흔히 먹던 뻥튀기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뻥튀기를 50원씩이나 주고 사 먹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죠리퐁은 주한미군들 사이에서 시리얼보다 훨씬 저렴하고 맛과 영양면에서 뒤지지 않는 입소문이 나면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죠리퐁은 포장에서도 당시 기존 제품과는 달랐습니다. 기존 제품들은 투명한 포장지를 적용해 내용물이 보이게 만들었던 반면, 죠리퐁은 포장지에 원색을 인쇄했습니다. 더불어 서양 카드의 문양 중 하나인 '스페이드'를 넣어 제품에 고급 이미지를 부여했죠. 이런 차별점들이 바로 오랜 기간 죠리퐁이 소비자들에게 꾸준히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기계를 좋아했던 윤영달 회장이 자전거 가게 주인이 되고 싶었던 어릴 적 꿈을 접고 직접 만들어낸 죠리퐁. 이어질 다음 편에서는 우리 곁에 친숙하게 자리 잡은 죠리퐁에 숨겨진 또 다른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드릴 생각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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