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연속 흑자. '노스페이스'로 상징되는 K아웃도어의 제왕. 영원무역그룹에 붙어온 화려한 수식어가 한순간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성기학 영원무역그룹 회장이 역대 최대 규모의 계열사 누락 혐의로 검찰에 고발되면서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안을 계기로 영원무역이 수십 년간 쌓아온 신뢰에 균열이 생기고 시장 평가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역대급 적발 사례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3일 기업집단 지정 자료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누락한 혐의로 성기학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이 특히 엄중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누락된 회사들의 규모 때문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성 회장은 2021~2023년 기업집단 지정 자료를 제출하면서 2021년 69개사, 2022년 74개사, 2023년 60개사 등 총 82개사(중복 제외)를 소속회사 현황에서 누락했다. 3년 동안 누락된 회사들의 자산 합계는 약 3조2000억원에 달한다. 이는 공정위 적발 사례 중 역대 최대 규모다.
공정위는 성 회장이 본인과 친족이 지배하는 회사를 고의로 숨겨 대기업 집단 규제를 회피하려 했다고 보고 있다. 공정위는 매년 자산총액 5조원을 넘는 그룹을 '대기업집단'으로 분류해 발표한다. 대기업집단에 포함되면 모든 계열사에 공시와 각종 신고의무가 부여된다. 또 계열사 사이 일감 몰아주기, 부당 내부거래, 부당지원 등에서 규제를 받게 된다.
단순 행정 착오로 보기에는 누락된 회사의 수가 너무 많고 자산 규모가 막대하다는 점이 이번 검찰 고발의 결정적 근거가 됐다. 실제 이번 누락으로 영원무역그룹은 2023년까지 대기업 집단 지정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성래은 부회장에 대한 지분 증여 등 핵심 승계 과정은 공시 의무라는 감시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영원무역을 향해 '꼼수 경영'이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영원무역 측은 "해당 건은 실무 착오가 있었던 사안으로 고의적 은폐나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면서 "과오를 인지하자마자 곧바로 자진신고 했으며, 재발 방지를 위한 내부 프로세스를 개선했다"고 해명했다.
단순 실수일까, 계산된 침묵일까
이번 영원무역의 계열사 누락 사태를 두고 업계의 시선은 '승계' 문제로 모이고 있다. 특히 차녀인 성래은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 과정이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직적 은닉의 배후에 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공시 의무와 내부거래 규제를 피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영원무역이 대기업 집단 지정을 피한 2023년, 성 부회장은 부친으로부터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비상장사 YMSA 지분 50.01%를 물려받았다.
이 증여로 성 부회장은 단숨에 'YMSA → 영원무역홀딩스 → 영원무역·영원아웃도어'로 이어지는 그룹 전체의 지배력을 확보했다. 만약 당시 대기업집단 규제가 적용됐다면 해당 지분 이동과 승계 과정은 시장에 상세히 공개되고 규제 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규제 공백 기간을 활용해 승계의 9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진짜 문제는 승계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성 부회장은 약 850억원 규모의 증여세를 납부하기 위해 YMSA가 보유한 건물을 영원무역에 매각했다. 여기에 승계 시점과 맞물려 지주사의 배당 정책이 변경되고 성 부회장 보수가 크게 오른 점 역시 주주가치보다 오너 일가 이익을 우선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다.
노스페이스 사업을 이끄는 셋째 딸 성가은 부사장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개인회사인 이케이텍 제품을 노스페이스 매장에서 판매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다. 공정위는 래이앤코와 피오컨텐츠 등 자매가 보유한 회사들이 핵심 계열사와 지속적으로 내부거래를 해온 사실도 확인했다.
지배구조의 견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2년간 영원무역과 홀딩스 사외이사들은 상정 안건에 '100% 찬성표'를 던졌다. 오너 일가의 독주를 막아야 할 감시자들이 사실상 거수기로 전락한 셈이다.
50년 만에 흔들
성 회장은 1974년 당시 27세 나이에 영원무역을 세웠다. 영원무역은 창업 이후 43년째 흑자 경영을 이어오며 국내 아웃도어 산업의 대표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글로벌 아웃도어 브랜드 생산·유통을 기반으로 매출과 이익이 꾸준히 늘며 경기 변동 속에서도 안정적인 실적을 유지해 왔다.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영원무역은 노스페이스·파타고니아·룰루레몬 등 글로벌 애슬레저 브랜드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웃도어 브랜드 아크테릭스 물량까지 확보했다.
팬데믹 이후 아웃도어를 일상복처럼 입는 '고프코어(Gorpcore)' 트렌드가 확산했다. 이 흐름은 노스페이스와 아크테릭스 매출 증가로 이어지며 실적을 견인했다. 영원무역홀딩스는 2022년 이후 4년 연속 4조원 이상의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시장에서는 영원무역을 대표적인 '안정적 현금 창출 기업'으로 평가해 왔다.
그러나 견조한 실적과 달리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우려가 많다. 총수의 사법 리스크가 브랜드 이미지에 미칠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에는 노스페이스 패딩 품질 논란까지 터졌다. 당시 노스페이스는 재활용 다운 소재(거위털과 오리털 혼용)를 사용하면서 충전재 정보를 '우모(거위) 솜털 80%·깃털 20%'로 잘못 표시했다. 이에 일부 소비자 사이에서는 "앞에서는 프리미엄 아웃도어를 내세우면서 뒤에서는 품질을 속이고 꼼수 승계까지 일으켰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투자 시장의 시선도 변수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핵심 투자 기준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지배구조 논란은 기관 투자자의 투자 판단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적이 양호하더라도 총수 리스크가 현실화된 기업에는 보수적인 평가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
향후 여론의 향방 역시 주목된다. 지배력 유지 과정에서 규제를 회피했다는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그동안 쌓아온 'K아웃도어 대표 기업' 이미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영원무역의 본업 경쟁력은 여전히 견고하지만, 기업 경쟁력과 별개로 지배구조 논란이 반복되면 브랜드 신뢰와 투자 심리에 모두 부담이 될 수 있다"며 "이번 사안을 계기로 실질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이뤄지는지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