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대한민국에는 그야말로 뜨거운 '도넛 열풍'이 불었습니다. 이름난 도넛 매장 앞은 아침 일찍부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는데요. 서너 시간씩 줄을 서서 겨우 도넛 몇 상자를 손에 넣는 것이 유행이자 능력이던 시절이 있었죠. 매일같이 펼쳐지던 이 진풍경의 중심에는 '노티드'와 '랜디스도넛' 같은 스타 브랜드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들 매장 앞 웨이팅 라인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한때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대한민국 디저트 시장을 흔들었던 이들에게 과연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사라진 희소성
국내 프리미엄 도넛 시장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곳은 수제 도넛 열풍의 주역인 노티드(Knotted)입니다. 2017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작은 도넛 가게에서 출발한 노티드는 불과 6년 만에 연매출 500억원대 규모의 외식 브랜드로 성장했습니다. 달콤한 우유생크림을 가득 채운 도넛은 '품절 대란'을 일으키며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당시 노티드의 성공을 이끈 핵심은 잘 구축된 브랜드 세계관과 희소성이었는데요. 소비자들은 긴 줄을 서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도넛을 손에 넣었고, 이를 SNS에 공유하며 일종의 성취감을 즐겼습니다. 쉽게 가질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브랜드 가치를 높인 셈이죠. 이러한 희소성 전략은 경쟁이 치열한 외식 시장에서 노티드가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장에 속도가 붙자 노티드는 새로운 선택을 합니다. 전국 주요 상권으로 출점을 확대하며 매장 수를 45개까지 늘렸고, 가맹사업도 추진했습니다. 여기에 온라인몰 판매까지 시작하며 소비자 접점을 대폭 넓혔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브랜드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사라졌다는 점인데요. 매장이 늘고 온라인 구매가 가능해지면서 노티드는 더 이상 어렵게 찾아가야 하는 브랜드가 아니게 됐습니다. 소비자들에게 노티드는 단순히 맛있는 도넛이 아니라 '줄을 서서라도 경험해야 하는 트렌디한 콘텐츠'였는데, 누구나 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그 특별함이 희미해졌죠.
결국 희소성이 사라지자 소비자들의 관심도 빠르게 식었습니다. 오픈 당시 '오픈런' 행렬이 이어질 정도로 화제를 모았던 부산 해운대 대형 매장이 지난해 말, 개점 3년 만에 문을 닫은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한때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공간이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는 도넛 가게 중 하나가 된 것이죠.
도넛의 퇴장
노티드의 부진은 단순히 경영 문제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도넛 시장 자체를 둘러싼 소비 환경도 크게 달라졌기 때문인데요. 최근 식품업계의 핵심 키워드는 '헬시플레저(Healthy Pleasure)'입니다. 건강을 챙기면서도 맛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로슈거 음료와 저당 디저트, 고단백 간식이 잇따라 출시되는 것도 이런 트렌드에 때문입니다.
반면 도넛은 대표적인 고당·고칼로리 식품입니다. 소비자들이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선택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요. 과거에는 "맛있으면 됐다"가 소비 기준이었다면 지금은 "맛있으면서도 건강해야 한다"로 기준이 바뀌고 있습니다.
물론 프리미엄 도넛 시장이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다만 업계에서는 과거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세가 다시 나타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SNS를 기반으로 한 '인증형 소비'의 수명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기 때문인데요.
실제로 최근 외식업계에서는 특정 메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더라도 유행이 지속되는 기간이 과거보다 크게 짧아졌습니다. 한때 SNS를 중심으로 열풍을 일으켰던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와 '버터떡'도 짧은 기간 화제를 모은 뒤 빠르게 관심에서 멀어졌죠.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과 트렌드를 찾아 이동하면서 미식 유행의 수명도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 셈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노티드 열풍은 단순히 도넛의 성공이 아니라 SNS 시대 경험 소비의 상징이었다"며 "이제 소비자들의 관심이 새로운 카테고리로 이동하면서 프리미엄 도넛 시장도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넛 대신 캐릭터
수요는 빠르게 식어가는데 몸집만 불린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매장 수가 급감하자 노티드를 운영하는 GFFG는 야심 차게 준비했던 가맹사업을 전면 철회했습니다. 무리한 매장 확장과 브랜드 가치 하락이 맞물리면서 기업의 생존을 위협받는 유동성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GFFG의 지난해 매출액은 501억원으로 전년 대비 20% 줄었습니다. 영업이익은 적자로 돌아서 85억원의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당기순손실 역시 11억원에서 156억원으로 대폭 불어났습니다. 이제 노티드는 공격적인 확장 대신 뼈를 깎는 수익성 중심 경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도넛 열풍이 식고 실적까지 악화되자 노티드는 새로운 먹거리 찾기에 나섰습니다. 노티드는 최근 자사 캐릭터 '슈가베어'를 중심으로 한 지식재산권(IP) 사업 확대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회사 스스로도 단순 F&B 브랜드가 아닌 'F&IP(Food & Intellectual Property)' 기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의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실제로 노티드를 운영하는 GFFG의 사업 구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됩니다. 지난해 제품 매출은 535억원에서 347억원으로 감소한 반면, 굿즈와 캐릭터 상품 등이 포함된 상품 매출은 74억원에서 132억원으로 증가했습니다. 도넛과 커피를 판매해 버는 돈은 줄었지만 캐릭터를 활용한 사업 비중은 커지고 있는 셈입니다.
GFFG에 따르면 슈가베어 IP를 활용한 누적 커머스 매출은 약 210억원 입니다. IP 커머스 부문은 최근 연평균 220%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 매출도 전년 대비 315% 증가했는데요. 이는 노티드가 도넛 판매에 의존하던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캐릭터를 중심으로 수익원을 다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에 따라 노티드는 인형과 문구류를 비롯해 패션·리빙·식품 등 다양한 분야로 슈가베어 IP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를 도넛 열풍 이후를 대비한 생존 전략으로 해석합니다. 더 이상 소비자들이 도넛을 사기 위해 줄을 서지 않는다면, 슈가베어라는 캐릭터를 앞세워 새로운 팬덤과 소비층을 확보하겠다는 계산인 겁니다. 한때 '도넛 맛집'으로 불렸던 노티드가 이제는 '캐릭터 브랜드'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줄 세우기'는 브랜드를 단숨에 스타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줄이 사라진 뒤에도 소비자를 붙잡아 둘 수 있는 가치가 없다면 열풍은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 있습니다. 지금 노티드가 남긴 가장 큰 질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반짝 떴다 사라지는 미식 트렌드의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습니다. 브랜드를 키우는 것은 확장일 수 있지만, 브랜드를 오래 살리는 것은 결국 희소성과 정체성이라는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