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정혜인 기자]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이 즐비한 상하이 신천지 일대를 거닐다 보면 한복판에 위치한 둥근 유리 건축물이 유독 시선을 끈다. 반투명 유리 패널이 겹겹이 맞물린 외벽은 낮에도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건물 앞 작은 화단에는 금색 강아지 조형물들이 놓여 있어 고급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나가던 관광객들도 저마다 걸음을 멈추고 스마트폰을 꺼내 들 정도로 눈길을 끈다. 유리 외벽 위로 'HAZZYS'라는 로고가 명품 브랜드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이 건축물은 LF 헤지스의 첫 해외 플래그십 스토어 '스페이스H 상하이'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면 유리 외벽을 통해 스며드는 자연광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1층은 타원형 구조를 따라 헤지스의 주요 컬렉션이 진열돼 있다. 천장에는 헤지스의 마스코트 캐릭터 '해리'가 조정 보트에 올라탄 채 손님을 맞이한다. 그 주변 벽면에는 영국에서 직접 들여온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조정 클럽 명패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1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은 VIP 고객을 위한 라운지다. 한쪽에는 빈티지 가구와 조정 장비 오브제들이 놓여 있고 조정 클럽 라커룸을 연상시키는 수납장과 위스키바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지난 9일 이곳에서 만난 석상현 LF 상하이지사장은 "스페이스H 상하이는 헤지스가 어떤 브랜드인지 직접 느끼고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20년 협업이 만든 토양
헤지스가 중국에 처음 발을 디딘 건 2007년이다. LF는 중국 3대 신사복 기업 중 하나인 빠오시냐오 그룹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헤지스의 중국 사업을 시작했다. 전반적인 브랜드 기획은 LF가 계속 맡으면서 현지 운영과 유통은 빠오시냐오가 담당하는 방식이다.
LF가 현지 기업과 손을 잡은 것은 중국 시장 특성 때문이었다. 중국은 땅이 넓고 각 지역마다 소비 특성도 다르다. 그래서 브랜드 하나를 전국에 안착시키려면 현지 네트워크와 운영 역량이 필수적이다. 석 지사장은 "중국 시장에 기대를 갖고 진출했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철수한 브랜드들을 수없이 봐왔다"며 "중국을 아는 회사와의 파트너십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헤지스는 빠오시냐오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현지화에 성공했다. 현재 빠오시냐오 내부에는 헤지스 전담 디자인실이 별도로 구성돼 있어 중국 컬렉션을 직접 기획한다. 대신 브랜드 전체의 무드와 톤은 한국과 동일하게 유지하기 위해 모든 스타일을 한국 본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최종 승인한다.
그는 "이런 형태의 운영 방식은 헤지스가 사실상 유일무이할 것"이라며 "빠오시냐오와 오랫동안 손발을 맞췄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헤지스는 2018년을 전후로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이 시기 중국 리테일 시장은 백화점 중심에서 대형 쇼핑몰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다. 헤지스는 이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쇼핑몰과 핵심 상권을 중심으로 유통망을 적극적으로 확대했다.
현재 헤지스는 상하이·항저우·난징 등 화동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600여 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들의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는 중국 시장에서 한국 패션 브랜드가 일궈낸 성과다.
소비 위축에도 '고성장'
현재 헤지스의 중국 매출은 지난해 기준 약 4900억원 수준이다. 중국 프리미엄 캐주얼 시장 내 독보적인 2위다. 이 성과는 중국 내수 소비가 전반적으로 침체한 가운데 이뤄낸 것이어서 더 주목받는다. 지난해 중국에서는 상당수 패션업체가 역성장했지만 헤지스는 지난해 전년 대비 10% 성장했다. 중국 패션업계에서는 이 시기 랄프로렌과 헤지스만 실질적으로 성장한 캐주얼 브랜드라고 본다.
헤지스가 소비 침체 속에서도 중국 소비자들에게 선택받을 수 있었던 건 '럭셔리 캐주얼'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헤지스는 중국 컬렉션에 영국 해리스 트위드와 스코틀랜드 원단 등 유럽 프리미엄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데님 원단도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에 납품하는 전문 업체와 협업해 조달한다. 중국 판매가가 한국보다 소폭 높지만 그에 상응하는 소재와 공정을 적용한다. 한국 본사에서 봉제와 마감 기준을 매년 직접 점검하며 품질을 관리한다.
헤지스는 쇼핑몰 내에서도 글로벌 캐주얼 브랜드들을 제치고 매출 상위권을 차지하며 입지를 굳히고 있다. 석 지사장은 "쇼핑몰에 입점한 매장의 경우 타미 힐피거, 라코스테보다 매출이 더 높다"며 "고객들도 헤지스를 더 고급스럽게 느낀다는 반응이 많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헤지스를 찾는 고객들은 경제력을 갖춘 소비자들이 많다. 현재 중국 내 헤지스의 핵심 고객층은 30대 중반 직장인이다. 상하이·항저우·난징 등 대기업과 전문직 종사자가 밀집한 화동 지역의 매출이 헤지스 전체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헤지스의 중국 오프라인 고객도 약 110만명에 달한다. 이는 단순 방문객이 아니라 구매 이력을 기반으로 헤지스가 관리 중인 실질 고객 수다. 경제력을 갖춘 소비자들이 헤지스를 반복 구매하는 충성 고객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다.
이에 헤지스는 이들을 대상으로 생일 선물 발송부터 연예인 행사 초청까지 VIP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석 지사장은 "브랜드의 전체적인 무드와 품질 디자인을 보고 찾아오는 고객들이 많다"며 "한 번 구매한 고객들이 계속 재구매로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신천지에 깃발을 꽂다
스페이스H 상하이는 헤지스를 계속 찾는 고객들을 위해 헤지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공간이다. 헤지스는 입지를 검토하는 데만 1년 반을 쏟아부었다. 석 지사장은 "가장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며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무산되는 일도 여러 차례 반복될 정도로 어렵게 자리를 찾아냈다"고 말했다.
이렇게 찾아낸 곳이 최고급 명품 시계 브랜드 브레게의 플래그십 스토어와 마주한 안다즈 호텔 1층이었다. 석 지사장은 "애초에 매물로 나온 자리가 아니었다"며 "안다즈 호텔이 직접 운영하던 바 공간이었는데 우리가 먼저 제안해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설명했다.
LF는 이 공간을 확보한 뒤 건물 자체를 다시 지었다. 석 지사장은 "기존에 있던 기둥만 남기고 외관 전체를 교체하는 작업을 거쳤다"고 말했다. 건물 설계는 셀린느·생로랑·질샌더 등 럭셔리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설계한 영국 건축 설계 회사 카스퍼 뮬러 크니어(Casper Mueller Kneer Architects)가 맡았다. 타원형의 독특한 구조는 헤지스의 브랜드 정체성인 영국 로잉 클럽 문화에서 가져왔다. 그는 "입지부터 설계까지 어느 것 하나 쉽게 결정한 게 없었다"며 "그만큼 투자를 많이 한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헤지스가 이처럼 대규모 투자까지 감행한 것은 이 공간이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페이스H 상하이는 헤지스라는 브랜드의 세계관을 직접 느끼고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됐다. VIP 고객들을 초청해 독서 모임이나 공예 클래스 등 문화 행사를 정기적으로 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석 지사장은 "쇼핑몰이나 백화점에서 헤지스를 접해 온 고객들이 이 브랜드가 어떤 브랜드인지 직접 느끼고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헤지스는 이런 플래그십 스토어를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선보일 계획이다. 베이징을 포함한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플래그십 스토어 입지도 물색 중이다. 이어 중국에서의 성과를 발판 삼아 글로벌 시장 공략도 가속화한다는 목표다.
석 지사장은 "한국과 중국을 발판 삼아 랄프 로렌과 같은 글로벌 브랜드에게 밀리지 않는 수준으로 성장하는 것이 헤지스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목표"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