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백화점그룹이 달라졌다.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신중함에서 벗어나 기회가 오면 때를 놓치지 않고 먹잇감을 무는 승부사의 기질이 부쩍 눈에 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현대백화점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정지선(45) 회장이 10년간 눌러왔던 확장본능을 본격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백화점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2번지에 신축되는 대형복합시설 '파크원(Parc1)' 내 상업시설을 운영하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고 21일 밝혔다. 현대백화점은 오는 27일 파크원 개발시행사인 ㈜Y22와 본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오는 2020년 여의도 파크원에 들어서는 현대백화점의 임차기간은 최대 20년으로, 연간 임차료는 300억원 수준이다. 이번 출점으로 현대백화점은 전국에 총 16개 백화점을 운영하며, 이 가운데 서울에만 8개 점포를 두게 된다.
연면적 62만8254㎡(19만380평)로 개발되는 파크원에서 상업시설이 차지하는 면적은 19만2321㎡(5만8279평)로 이 가운데 절반인 8만9100㎡(2만7000평)를 현대백화점이 운영한다. 이렇게 되면 지난 2월 증축을 끝내고 서울지역 최대의 백화점으로 재탄생한 신세계 강남점(8만6500㎡)을 제치고 현대백화점이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서울에서 얼마 남지 않은 대규모 상업시설인 파크원은 롯데와 신세계도 관심을 뒀으나 최종적으로는 현대백화점이 가져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여기에는 정 회장의 의중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정 회장은 직접 개발 콘셉트와 방향을 잡는 등 이번 사업 추진을 진두지휘했다.
정 회장은 "파크원에 들어서는 현대백화점을 대한민국 최고의 랜드마크로 만들 것"이라며 "현대백화점그룹의 위상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로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 서울 여의도에 세워지는 파크원 조감도. 이곳에는 백화점 등 상업시설을 비롯해 오피스 2개동과 호텔이 함께 들어설 예정이다. |
현대백화점그룹의 변신은 백화점에 그치지 않는다. 신규면세점 허용과 관련해 면세점업계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지난 3월 현대백화점은 "서울지역 시내면세점은 최소 4개 이상 허용돼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실시된 두차례의 서울지역 면세점 입찰에선 신규사업권을 내주는 첫번째 입찰(6월)에만 참여하고, 기존 사업자(롯데면세점·SK네트웍스)의 특허권을 빼앗아오는 두번째 입찰(9월)에는 아예 신청서를 내지 않았다.
당시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기존 사업자의 것을 가져오는 것은 상도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참여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랬던 현대백화점그룹이 올해는 이해관계가 엇갈린 면세점 특허권을 두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등 어느때보다 공격적으로 변했다. 정부가 올해 서울시내 면세점 4곳을 추가로 열기로 확정한 뒤에는 곧바로 "신규 입찰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현대백화점그룹은 패션과 제조, 렌털업까지 손을 뻗쳤다. 지난 2012년 의류업체 한섬을 인수해 빠른 성장세를 이끌어낸데 이어 최근에는 연매출 5000억원대를 올리는 SK네트웍스 패션사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현대백화점그룹은 삼성물산 패션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의류업계 3~4위 기업으로 올라선다.
현재 현대백화점그룹은 동양매직 인수전에도 뛰어든 상태다. 현대백화점과 현대홈쇼핑이 동양매직 인수를 위한 본입찰 적격자로 선정돼 실사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4월 렌탈·케어시장 진출을 위해 600억원을 들여 '현대렌탈케어' 법인을 설립한 데 이어 동양매직도 사들여 판매뿐 아니라 제조까지 아우르는 그룹으로 변신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행보로 풀이된다.
▲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저성장 국면에서 벗어날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를 주문하고 있다. |
현대백화점그룹의 공격적인 움직임은 회장 취임 10년을 앞두고 있는 정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재계는 해석하고 있다. 2007년말 서른 여섯의 나이로 30대 그룹 최연소 회장으로 취임한 정 회장이 서서히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정 회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과감한 변화와 혁신"을 주문한데 이어 올해는 "위기는 실패가 두려워 현실에 안주할 때 찾아온다. 위기상황을 정면돌파하자"고 강조했다. 저성장 국면을 탈피할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그룹 총수로서 총대를 메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 회장은 현대백화점 경영관리팀 과장으로 입사(1997년)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기획실장(2001년), 부사장(2002년), 부회장(2003년) 등을 거쳐 2006년 정 명예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부터는 사실상 그룹을 이끌어왔다. 그가 회장으로 공식 취임(2007년)할 때 전문경영인으로서 보좌했던 경청호 전 부회장은 2014년초 퇴임했다. 경 전 부회장의 역할은 현대백화점그룹의 기획조정본부 이동호 사장이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