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맛이 있냐 없냐를 얘기하다가, 이제는 소비자들도 포기한 것 같아요. 아니면 이제 인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계속 나오니까요. 언젠가 좋아할 만한 게 나오겠지라고 생각하겠죠. 이번 바닐라맛은 빙그레가 맛에 있어서는 이제 정신을 좀 차리고 있구나라는 반응이었으면 합니다."
오디맛, 귤맛, 리치피치맛, 그리고 이번달에 나온 바닐라맛까지. 뚱바(뚱뚱한 바나나맛 우유)로 불리는 '바나나맛 우유'의 한정판 형식으로 선보이는 '세상에 없던 우유' 시리즈다.
이 시리즈 중 하나를 사서 마신 뒤 진지하게 맛을 평가하려 한다면 '아재'일 확률이 높다. 뭐 이런 우유를 만들었냐며 다 마신 용기를 곧장 버렸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즘 젊은 층의 '트렌드'에 둔감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 '인싸'들의 음용법은 이렇다. 우유 단지에 빨대를 꽂기 전에 일단 예쁘게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호기심을 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셔본다. '또 나왔네', '나도 먹어봤다'라는 등의 멘트와 함께 제품 사진을 SNS에 올린다. 위트 있는 '맛평(맛에 대한 평가)'을 더한다. 이게 바로 '세상에 없던 우유' 시리즈를 즐기는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먹는 법'이 남다른 이유가 있다. 세상에 없던 우유 시리즈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려고 내놓은 게 아니어서다. 먹어본 사람은 안다. 이 시리즈는 맛이 아니라 '재미'에 초점을 맞춘 제품이다. 소비자들은 이 시리즈의 이름처럼 세상에 없던 맛이 과연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지갑을 연다. 맛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의외로(?) 괜찮다면 괜찮은 대로 즐거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간 식품업체들의 관심사는 오직 소비자의 '입맛'에 있었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곧장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는다. 실제로 그렇게 사라진 제품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최근 이 공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꼭 입맛을 사로잡지 않더라도 소비자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제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대표 주자로 꼽히는 게 바로 '세상에 없던 우유' 시리즈다.
최근 서울 중구 빙그레 본사에서 이 시리즈를 기획한 이후성 데어리(유제품) 제품팀장을 만났다. 이 팀장은 네 명의 팀원과 함께 빙그레의 유음료를 담당하고 있다. 특히 바나나맛 우유는 빙그레 전체 매출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제품이어서 전 팀원이 함께 담당하고 있다. 이제 막 40대가 된 이 팀장을 제외한 팀원들의 나이는 20~30대로 젊은 편이다.
세상에 없던 우유 시리즈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려면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내 대표 장수제품인 바나나맛 우유는 당시 '정체기'를 맞았다. '목욕탕에서 먹는 우유'라는 수식어는 바나나맛 우유의 매출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효과를 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브랜드 이미지가 그대로 굳어지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있었다.
이 팀장은 "바나나맛 우유가 전형적인 이미지에 갇히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익숙한 브랜드를 그대로 두면 도태될 가능성이 커 소비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려고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지난 2015년 말 빙그레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드라마인 '응답하라 1988'에 맞춰 선보인 '1988 에디션'을 시작으로 바나나맛 우유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2016년에는 용기에 제품명을 'ㅏㅏㅏ맛 우유'라고만 인쇄해 소비자들이 직접 메시지를 채우는 마케팅을 도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다 바나나맛 우유를 콘셉트로 한 플래그십스토어 '옐로우 카페'를 여는 등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전략은 적중했다. 이 팀장은 "2016년에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고, 바나나맛 매출이 기존 연 1600억원 정도에서 그해 1800억원가량으로 200억~300억원 올랐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소비자들이 새로운 시도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재미있어한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이후 다양한 이벤트를 시도해왔고, 세상에 없던 우유 시리즈도 이런 맥락 속에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 시리즈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팀장은 "처음 오디맛 우유가 나왔을 때 가장 반응이 좋았는데, 월 매출이 15억~17억원 정도였다"면서 "한 달에 10억~20억원 정도 팔리면 유음료 시장에선 '대박'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런 관심은 바닐라 맛을 내놓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반응이 좋다 보니 빙그레는 당분간 이 시리즈를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그는 "애초 이번 시리즈를 시작할 당시 '일단 2년 정도'만 계획했다"면서 "다행히 예상 밖으로 소비자 반응이 좋아 당분간 추가 제품을 계속 준비할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처음에 저희 연구소에 이런 제품을 몇 가지나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101가지도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면서 "지금도 여러 후보군이 있는데 소비자들의 피드백을 보면서 순서를 정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일부 소비자들은 빙그레가 일부러 '맛없는' 제품을 골라 출시하고 있다는 장난 섞인 지적을 내놓기도 한다. 워낙 낯선 맛인 데다 결국 '바나나맛 우유'가 낫다는 결론을 유도하는 듯한 기분 때문이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이 팀장은 "일부러 맛없게 만드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하다 보니 대중적인 입맛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면서 "다만 호불호가 많이 갈리면 제품이 너무 안 팔릴 수 있어 이번 바닐라맛의 경우 대중성을 어느 정도 감안한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바닐라맛은 국내에서 우유제품으로 만들어진 적은 없지만 많은 소비자들에게 익숙하다는 점을 고려했다는 설명이다.
실제 만들 수는 있지만 우유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맛은 후보군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이 팀장은 "카레맛과 고추냉이맛도 마셔봤는데,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해 리스트에서 제외했다"면서 "소비자들이 재미있게 먹을 수 있는 맛의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기존 바나나맛 우유를 뛰어넘는 제품을 굳이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는 "만약 그런 제품이 있다면 바나나맛 우유 용기인 '단지'에 담지 않을 것 같다"면서 "정말 맛있다면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시리즈는 일종의 분위기 메이커 같은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이 제품들이 아직은 '분위기 메이커'일뿐이긴 하지만 향후 소비자들의 요구가 많으면 정식 데뷔할 가능성도 있다. 이 팀장은 "소비자들이 꾸준하게 찾을 만한 제품이 있다면 나중에 정식 판매를 요구하는 반응이 나올 것"이라며 "그래서 꾸준히 팔리겠다 싶으면 그 제품은 쭉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바나나맛 우유의 이미지도 점차 '젊어지고' 있다는 게 빙그레 내부의 판단이다. 이 팀장은 "인지도나 이미지 조사 등을 해보면 과거에 비해 즐거움이나 새로움을 느낀다는 소비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면서 "특히 20~30대 층의 반응이 좋다"라고 전했다.
이 팀장은 그러면서 "바나나맛 우유를 목욕탕 우유로 기억하는 분들은 그대로 이 제품을 찾아주길 바란다"면서 "젊은 층의 경우 다양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경향이 강한 만큼 그런 분들은 이런 일종의 '놀이'를 통해 제품을 찾도록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혁신(革新). 묵은 제도나 관습, 조직이나 방식 등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치열한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어왔고,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성장공식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성장이 아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비즈니스워치가 창간 6주년을 맞아 국내외 '혁신의 현장'을 찾아 나선 이유다. 산업의 변화부터 기업 내부의 작은 움직임까지 혁신의 영감을 주는 기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점. 그 시작은 '혁신의 실천'이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