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시원한 맥주 한잔은 직장인의 낙이다. 짜릿한 목 넘김과 함께 고단했던 하루를 털어 넘긴다. 노포에 앉아 밤바람 맞으며 들이키는 생맥주도 좋고, 집에서 개운하게 씻은 후 TV 앞에서 마시는 캔맥주·병맥주 등 '혼술'도 좋다.
최근엔 수제맥주·수입맥주 등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수제맥주와 피자를 함께 즐기는 '피맥'과 같은 새로운 맥주 소비 풍속도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혼술 문화가 퍼지고, 다양한 맛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등 맥주 소비 트랜드가 변한 결과다.
다만 맥주와 함께 즐기는 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에는 두 가지 걸림돌이 있다. 쌓여가는 빈 잔만큼 늘어나는 뱃살, 그리고 이에 반비례해 얇아지는 지갑이다. 맥주를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술값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영수증을 보고 있노라면 맥주를 더 마시고 싶어도 입맛만 다시게 된다.
◇ 국산 맥주는 왜 비쌀까
사실 우리가 국산 맥주를 마실 때 내는 돈의 상당 부분은 세금이다. 현행 주세법은 '종가세' 체계로, 주류 제조원가와 판매관리비·마케팅비 등을 합한 출고가를 과세표준으로 삼고 있다.
국산 맥주에 매겨진 주세율은 출고가의 72%에 달한다. 여기에 주세액의 30%만큼 교육세가 붙는다. 주세와 교육세를 포함한 전체 가격의 10%에 해당하는 부가가치세도 추가돼야 한다.
결국 소비자들이 국산 맥주를 소비할 때 내야 할 세금은 출고가 대비 112.96%에 달한다. 국산 맥주의 출고가가 1000원이라면 2129.6원을 주고 마시게 된다. 국산 맥주 소비자 가격의 절반 이상은 세금인 셈이다.
반면 수입맥주는 판매관리비 등을 제외한 수입신고 가격이 과세표준이라 주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 덕분에 '4캔에 만원'과 같은 공격적인 가격 마케팅이 가능했다. 국산 맥주업계의 '역차별' 주장이 나온 이유다.
◇ 수제맥주, 가볍게 한잔하기 힘든 이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국산 수제맥주 역시 동일한 주세 셈법이 적용된다. 하지만 수제맥주업계가 체감하는 주세 부담은 대기업의 그것보다 훨씬 무겁다.
수제맥주업체는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라 대량생산에 따른 생산비 절감 효과를 누리기 어렵다. 게다가 다품종 맥주를 만들다 보니 양조장을 운영하는데 많은 인건비가 투입된다. 자연스럽게 출고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출고가가 높아지는 만큼 세금 부담도 커진다. 맥주 1병당 단가가 50원 오르면 세금은 56.48원 오른다. 현재 수제맥주는 출고 수량에 따라 20%~60%가량 과세표준 경감 혜택을 받고 있지만, 비싼 재료비와 다품종 맥주 개발비가 주세 산정에 포함되며 발생한 세금 인상분을 상쇄하기엔 부족하다.
수제맥주업계는 공정한 시장경쟁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행 주세체계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볼멘소리도 나온다. 수제맥주와 대기업 맥주는 가격 출발선부터 다르다 보니, 맛과 품질을 내세워도 제대로 경쟁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 수제맥주업계가 바라보는 주세 개편안
그런데 얼마 전 수제맥주업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정부는 지난 5일 더불어민주당과 당정 협의를 열고 주세법을 현행 종가세 체계에서 종량세 체계로 바꾸기로 했다. 이번 주세법 개편안은 내년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종량세는 말 그대로 술 용량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출고가격이 아니라 리터(ℓ)당 세금을 매기게 된다. 이번 주세법 개편안으로 맥주는 국산·수입산 또는 병·캔·생맥주 구분 없이 리터당 830.3원의 세율이 일괄 적용된다.
수제맥주업계는 종량세 개편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종량세 개편은 수제맥주업계의 숙원으로 꼽혀왔다. 다품종 소량생산에 따른 원가 상승분과 높은 인건비·재료비·개발비 등이 세금 계산에서 모두 제외되기 때문이다.
수제맥주업체 세븐브로이의 김정수 마케팅 고문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이제야 바로잡혔다"고 이번 주세법 개편안을 평가했다. 그는 "이제 수제맥주도 '만원에 네병' 등 공격적인 가격 마케팅을 펼쳐 소비자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진만 한국수제맥주협회 과장은 "혼술문화 확대와 불경기 여파 등으로 생맥주 시장이 하향세다. 병·캔맥주를 통한 소매점 유통채널 확대는 필수"라고 말했다. 현재 소규모 수제맥주업체들은 생맥주 위주로 영업하고 있는데, 향후 유통채널 확대를 염두에 두고 주세 개편을 반긴다는 설명이다.
◇ 수제맥주, 종량세 날개 달고 날아오르려면
주세법 개편을 계기로 수제맥주업계가 비상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김정수 고문은 "수제맥주업체의 장점인 '기민함'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수제맥주업체는 대기업보다 신제품 개발에 부담이 덜하다. 애초에 생산량이 많지 않은 만큼 시장 반응이 나쁘더라도 재고 처리가 비교적 용이하기 때문이다. 종량세 개편으로 신제품 개발비용이 세금 책정에 포함되지 않으니 더 다양한 수제맥주가 소비자를 만날 길이 열린 셈이다.
수제맥주업계에 정책 지원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진만 과장은 "이제 산업 관점에서 수제맥주를 바라봐줬으면 좋겠다"며 "수제맥주는 공정상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 수제맥주업계의 고용 창출 효과에 대해 일종의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주세법 개편 소식이 수제맥주에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울 강서구에서 수제맥주 펍을 운영하는 A씨는 "주세법 개편 발표 이후 가게를 찾는 고객이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병·캔·생맥주가 품목별로 가격 등락이 달라 금전적 이익이 늘어날지는 잘 모르겠다"면서도 "수제맥주에 대한 소비자 관심이 증가하고 여러 브랜드가 추가로 등장하는 등 주세법 개편이 업계 전반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