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산업은 지난 1987년 물질특허제도를 도입한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물질특허는 화학적 방법으로 발명, 제조한 물질에 대한 권리를 일정기간 보호해주는 제도를 말한다. 자체적으로 개발한 의약품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면서 국내 제약사들은 점차 연구개발(R&D) 투자에 나섰다. 이때부터 진짜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 셈이다.
엄승인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약무정책실장은 국내 제약산업에서 '물질특허'가 갖는 의미에 주목했다. 엄 실장은 박사 학위 논문을 통해 1988년부터 2017년까지 30년간의 방대한 자료를 직접 취합해 한국 제약산업과 기업의 성장 변화를 분석했다. 기존에 1년부터 최대 10년 주기로 제약산업을 분석한 보고서가 발표된 적은 있지만 물질특허제도 도입 이후 최근까지 제약산업 전반을 다룬 건 이 논문이 처음이다.
엄 실장은 이 논문이 향후 한국 제약산업을 분석하는 새로운 지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를 만나 최근 30년간 국내 제약산업의 성장패턴 및 요인 등에 대해 들어봤다.
◇ 완제의약품 생산량 8배 증가…양적 성장
엄 실장에 따르면 최근 30년간 한국 제약산업은 약 8배에 달하는 양적 성장을 이뤄냈다. 1988년 2조 3000억원 수준에 불과했던 연간 의약품 생산량이 30년 사이에 17조 3000억원대로 뛰었다.
전체 431개 제약사 가운데 생산 실적 기준으로 상위 30대 기업을 꼽았더니 동아제약이 12조 9540억원으로 1위에 올랐다. 대웅제약이 9조 9950억원으로 2위에 올랐고, GC녹십자가 9조 6380억원으로 3위, 한미약품이 9조 2580억원으로 4위, 종근당이 8조 7620억원으로 5위를 기록했다. 한국콜마 인수 전 CJ헬스케어(7조 9470억원), 유한양행(7조 7050억원), JW중외제약(7조 7010억원), 한독(6조8590억원), 일동제약(6조 6090억원)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엄 실장은 "기업의 성장지수를 측정할 때 주로 매출과 고용 증가, 이익률, 시장점유율 등을 사용하는데 완제의약품의 생산 실적도 전체 기업의 성장을 알아볼 수 있는 대용(Proxy) 자료"라고 말했다.
◇ 성장률 차이는 물질특허‧의약분업 등 '규제' 대응
전체 제약사의 연평균 성장률은 7.59%였고, 30대 제약사는 7.56%로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차이가 나타났다.
엄 실장은 그 원인으로 '규제'를 꼽았다. 전체 제약사들 중 상위 30대 기업들이 규제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얘기다. 이는 전체 제약사들의 성장률이 눈에 띄게 떨어졌던 시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998년 -4.1%, 2000년 -5.9%, 2012년 -2.5% 등 특정 시기에 성장세가 크게 꺾였다. 1988년은 물질특허 도입 직후였고, 2000년은 의약분업, 2012년엔 약가 상승을 견제하기 위해 일괄 약가인하가 이뤄진 시기다.
*의약분업: 의사는 환자에 대한 진료와 처방, 약사는 처방에 따른 조제를 맡도록 의료 역할을 분담한 제도.
엄 실장은 "물질특허가 도입되면서 제약기업들은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기업과 아닌 기업으로 나뉘었다"면서 "현시점에서 볼 때 당시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 활발하게 물질특허를 획득한 기업들이 크게 성장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물질특허를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로 화장품 기업인 아모레퍼시픽을 꼽았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 1981년부터 활발하게 특허를 출원하면서 시가총액 1조원을 넘겼다. 의약품 뿐만 아니라 화장품도 과거에 특허를 많이 출원한 기업이 혁신성(기업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또 우수제조시설기준(GMP) 의무화를 도입한 1992년 이후 GMP 시설에 투자한 기업들이 꾸준한 성장을 유지했다. 의약분업의 경우 시행 직후 생산 실적이 급감했지만 이후에는 전문의약품 비중을 높인 기업들이 크게 성장했다.
그는 "약가인하의 경우 대형사들에 더 큰 위기였지만 대체로 의약정책 변화에 더 잘 적응하거나 대처했다"면서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규제 시행에 발 빠르게 투자한 기업들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신약 연구개발을 선도한 한미약품과 CJ헬스케어, 일동약품 등은 가장 가파르게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 '선제적 대응'이 가장 중요한 성장 비결
상위 30대 기업과 전체 국내 제약사들의 패턴에서도 이런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431개 제약사 중 47.6%에 달하는 205개사들은 국내사와 비상장, 중소 및 중견기업, 21년 이하 연혁을 가지고 화학합성물과 제네릭을 생산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상위 30개사는 달랐다. 22개사(73.3%)가 국내사, 상장사이면서 대기업으로 21년 이상의 연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전문의약품을 주로 생산하고 신약‧개량 신약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기업들은 물질특허와 의약분업에 이어 최근 각광받고 있는 바이오의약품까지 제약산업의 흐름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엄 실장은 "규제가 신약 발매 증가, 전문의약품 생산 비중 증가, GMP 시설 투자 등 기업의 성장에 영향을 줬다"라며 "규제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성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됨을 알 수 있었다"라고 강조했다.
미래 성장을 위해 국내 제약사들이 수립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전략은 한 마디로 '선제적 대응'이라는 얘기다.
끝으로 그는 "모든 제약사들의 성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의미 있다"면서 "기업의 R&D 투자에 따른 결과, 기술과 시장의 발전은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고, 규제의 영향도 기업의 즉각적 반응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산업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