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값이 폭락하고 있다. 쌀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극심해지면서다. 우리 국민들의 쌀 소비는 감소하고 있지만 생산량은 기술 고도화, 풍년 등 영향으로 계속 증가했다. 농가에서는 '쌀 값이 껌 값보다 못하다'는 한숨이 나온다. 전망도 어둡다. 특히 가을 햅쌀이 출하하면 쌀 값은 더 떨어질 수 있다. 정부도 쌀을 '시장 격리'시키는 것 외에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시장에서는 단발성 대책보다 타 작물 재배 유도 등 장기적인 관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껌값'된 '쌀값'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지난 22일 기준 쌀 값(20㎏)의 도매가격은 4만5750원이다. 전년 대비 1만1606원 하락했다. 비율로는 20% 이상 떨어졌다. 쌀 값은 지난해 10월부터 12개월 연속 하락세다. 고물가가 극심한 상황에서 이례적이다. 현재 식품뿐 아니라 주요 농작물은 모두 연일 오름세다. 대표적으로 밀의 가격은 최근 내림세라고 해도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배추, 양파, 무 등도 마찬가지다.
실제 쌀 값 하락은 대형마트에서도 체감할 수 있다. A대형마트에서는 이달 기준 혼합 쌀 20㎏가격이 4만5000원까지 떨어졌다. 전년 대비 24.8% 하락했다. 지난 여름부터 하락세가 두드러졌다. 7월 4만9000원, 8월 4만7000원이었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산지 가격이 떨어지면서 소매가격도 내려갔다"며 "시기상으로도 가을 햅쌀이 풀리는 시기다. 그 이전에 묵은 쌀을 빨리 소진해야 하는 것도 가격 인하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쌀 값이 껌 값이 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즉석밥 한 그릇의 무게는 200~210g이다. 온라인몰에서 개당 700~800원 사이에 구매할 수 있다. 이 즉석밥 한 개를 만들기 위해선 쌀 100g이 필요하다. 20㎏ 소매가격 4만5000원 기준 100g당 225원인 셈이다. 이는 껌 한 통 가격에도 못 미친다. 실제로 한 개당 105g인 자일리톨 껌의 가격은 2290원이다. 가장 싼 후라보노 껌의 가격도 1000원이다.
왜 폭락했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절대적이다. 쌀 값도 마찬가지다. 최근 쌀 값 폭락은 생산량과 소비량이 어긋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농가들은 쌀 재배 면적을 크게 늘렸다. 집콕 트렌드로 집밥 열풍이 불어서다. 지난해 벼 생산면적은 73만2477㏊였다. 20년만에 처음으로 증가했다. 여기에 풍작까지 겹쳐 쌀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하지만 엔데믹이 다가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사람들의 외출이 늘며 쌀 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사실 쌀 소비는 지속적으로 감소해왔다. 우리 국민들의 식습관이 바뀐 영향이다. 한국농촌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012년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69.8㎏이었다. 하지만 2021년 56.9㎏으로 대폭 줄었다. 같은 기간 쌀 생산량은 401만톤에서 388만톤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풍작과 흉작 유무를 고려하면 생산량이 거의 줄지 않았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정부의 수요 예측 실패도 최근 쌀 값 폭락의 원인으로 꼽힌다. 정부는 '양곡관리법'에 따라 쌀 값을 조정한다. 공급이 많을 때는 '시장 격리'를 통해 가격을 유지한다. 공급이 부족하면 비축분을 풀어 가격 상승을 최소화한다. 농업 단체에서는 지난해 정부가 제때 시장 격리를 하지 않아 가격 하락 폭이 더 커졌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정부는 한 해 40만톤이 넘는 쌀을 매년 '식량 안보'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정부를 향한 비판은 더 커졌다.
다만 쌀 값 폭락의 원인을 시장 격리 실패 때문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많다. 지난해 정부는 총 37만톤을 사들여 시장에서 격리했다. 하지만 워낙 '대풍'이었던 탓에 재고가 많았다. 시장 격리도 결국 만병통치약이 아닌 셈이다. 매입과 보관 등 격리에 따르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양곡관리법이 자연스러운 쌀의 수요와 공급 형성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쌀 값의 운명은
쌀 값 하락세는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곧 가을 추수기가 본격화한다. 쌀 값이 계속 하락하는 상황에서 햅쌀까지 풀린다면 가격 폭락은 불가피하다. 특히 올해도 풍년이 예상된다. 일조량과 강수량 등 벼농사에 좋은 기상 여건이 이어졌다. 재배면적도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벼 재배면적은 72만7158㏊로 지난해 73만2477㏊에서 소폭 감소했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는 전년도와 비슷한 380만톤 안팎의 쌀이 출하될 것으로 보고 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통과 여부도 변수다. 현행법은 쌀 초과 생산량이 3% 이상, 쌀 값이 전년 대비 5% 이상 떨어지면 정부가 재량으로 일부를 매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개정안은 정부의 매입을 재량이 아닌 의무화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개정안 통과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반면 여당은 과잉 생산 우려 등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정치권의 권력 싸움으로 번진 만큼 통과 여부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개정안 시행 여부에 따라 쌀 값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시장에선 본질적인 해결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쌀 값 폭락의 근본 원인은 공급 과잉에 있다. 생산량을 줄이는 등 장기적인 안목의 대안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벼 이외의 타 작물 재배 유도다. 정부는 2020년 논 타작물 재배지원사업(쌀 생산조정제) 지원사업을 중단했다. 이외에도 쌀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안도 요구된다. 분질미(가루쌀)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분질미'는 전분 구조가 밀가루와 비슷하다. 빵 등 가공제품을 만드는 데 유리해 밀가루 수요를 대체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쌀 소비량은 매년 뚜렷하게 감소하고 있다. 반면 쌀 재배 면적과 생산량은 과거와 비교에 큰 차이가 없다"며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정부의 해결 과제"라고 말했다. 이어 "쌀 매입 의무화 조치보다는 쌀 재배 면적을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지가 관건으로 보인다"면서 "고물가인 상황에서 분질미 사용에 대한 연구와 개발도 중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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