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임원 인사를 앞둔 어느 날, 정치권에서 A은행장에게 인사 청탁이 들어왔습니다. B인사를 본부장(임원)으로 승진시켜달라는 내용인데요. B인사라면, 마침 임원 승진 명단에 포함돼 있기도 했습니다. A은행장의 선택은 어땠을까요. B인사는 바라던 대로 본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은행이 아니라 다른 계열사였습니다. 다 된 밥에 재 뿌린 인사 청탁의 결말입니다.
A은행장은 최근 우리은행 사외이사로 복귀한 신상훈 사외이사입니다. 과거 신한은행장 시절 유명한 일화인데요. 최근 신 이사는 그때를 떠올리며 "일 잘하는 친구였는데, 아쉽다"며 "어쨌든 승진은 시켜준 게 아니냐"고 얘기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신한은행 관계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되곤 합니다. 인사 청탁을 하면 오히려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을 확실하게 각인해준 계기가 된 건데요. 이것이 어쩌면 신출 은행을 1등으로 만든 비결이기도 할 겁니다.
지금 한창 새로운 행장을 뽑는 우리은행은 어떨까요. 지난주 은행장 후보 공모에 최종적으로 전·현직 임원 10명이 지원하면서 일단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자유롭게 은행장 공모에 응할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진 건데요. 반면 은행장 공모를 전후로 상호 비방전과 함께 옛 상업·한일은행 간 해묵은 갈등이 표출되는 등 구태가 여전히 눈에 띄기도 합니다.
◇ 힘 실리는 사외이사
이런 분위기 탓인지 우리은행 일각에선 "달라진 게 별로 없는 게 아니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옵니다. 청탁의 대상이 그동안 정부와 정치권에서 이제 사외이사들로 바뀐 게 아니냐는 것이죠. 그러면서 과거 KB금융처럼 사외이사들이 자기 권력화하면서 우리은행 내부 인식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외풍이 등장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외이사들을 대상으로 인사 청탁이 이뤄지는지 아닌지 여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공무원이나 유력 정치인에 줄을 댔던 때와는 분명히 달리 봐야 할듯 한데요. 뒷배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고, 또 보이지 않는 '비선'의 손에 움직여 왔다면 지금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개별 주주가 가진 지분은 많다고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주주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사외이사들이니까요. 정부도 애초 우리은행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주주권 행사를 전제로 했던 만큼 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들에게 힘이 실리는 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동안 국내 금융지주사나 은행 지배구조의 가장 큰 고민은 대리인 문제였습니다. 사실상 주인이 없다 보니 권한을 위임받은 지주 회장이나 은행장이 큰 힘을 갖게 되고, 기존 경영진이 선임한 사외이사들은 거수기에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요. 반대로 KB금융 사태처럼 경영진과 손잡은 사외이사들이 자기 권력화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반면 과점주주들이 추천한 사외이사의 권한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물론 우리은행 내부 관계자들과는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고, 경영진과 미묘한 갈등의 소지도 있을 수 있는데요. 이 과정에서 양측이 어떻게 건전한 견제와 균형의 관계를 유지하느냐가 과점주주 지배구조의 성공을 결정하는 관건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 변화는 시작됐는데, 준비는 됐을까
또다시 신한금융 사례를 들어보면 신한금융이나 은행 경영진은 인사 청탁이나 외압이 들어올 때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재일교포 주주(사외이사)들 때문에요"라고요. 17%의 지분을 가진 재일교포 주주들이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는 겁니다. 실제로 이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경영진 입장에선 핑계(?)를 댈 수는 있죠.
우리은행도 이제는 "과점주주들 때문에요"라고 얘기할 수 있고, 이것이 먹혀들면 정부의 과점주주 실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상용 사외이사(전 공적자금관리위원장)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외풍에 대해 이런 답을 내놨습니다. "자율성은 주어졌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그 정당성을 시장이나 은행 경영진, 사외이사들이 스스로 획득해야 합니다."
우리은행도 이제 스스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사철마다 여기저기 줄을 대러 돌아다니는 일도 그만둬야 하고요. 사외이사 역시 그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지난 11일 행장 후보 공모 마지막 날. 은행이 후보자 지원 서류를 받았지만, 이를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장동우 임원추천위원장(이하 임추위원장)에게 전달했습니다. 또 장 위원장은 최근 은행장 후보들에게 직접 이메일을 통해 향후 일정을 전달했습니다. 오는 19일 3차 임추위가 열리며 1차 인터뷰 대상자(숏리스트)를 정하고, 1차 인터뷰 때 PT자료를 준비해달라는 내용 등을 말이죠.
이 과정에서 이사회 사무국 등이 개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임추위의 통제로 이뤄진다는 겁니다. 작은 변화이긴 하지만 시작은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