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없는 사회'가 가까워지고 있다. 카드가 현금을 지운 지 십수 년도 채 되지 않아 생긴 변화다. 전환은 세계적이다. 미국 뉴욕 명물 메트로카드가 곧 사라지는 게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지하철·버스를 탈 때 쓰는 이 노란 플라스틱 카드는 뉴욕시가 2021년 비접촉 결제를 도입한 뒤 2024년 폐지되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기반 옴니(OMNY, One Metro New York)로 대체된다.
국내에서도 간편결제 방식이 카드를 대체해 가고 있다. 과거 현금 없는 사회를 만들었던 국내 신용카드사들도 지갑 없는 사회로 넘어가는 소비자들을 따라잡기 위해 간편결제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가맹점 수수료 인하 등으로도 위기에 몰린 카드 업계의 '디지털 전환' 시작점이 바로 '카드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줄어드는 '플라스틱 카드'…의미는?
금융감독원과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7개 전업 카드사(신한·KB국민·삼성·현대·하나·우리·롯데)의 체크카드 발급량은 지난 1분기 6123만3000장으로 1년 전(6157만4000장)보다 34만1000장 줄었다. 2021년도 1분기(6585만9000)와 비교하면 462만6000장이나 감소했다. 가장 큰 이유는 플라스틱 카드가 없어도 되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체크카드 없이 계좌를 연동하기만 해도 되는 간편결제 앱을 쓰는 이들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체크카드의 주력 고객인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가 간편결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간편결제는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시장을 이끄는 주력은 카드업계가 아니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발표한 '국내 지급결제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간편결제 시장에서 핀테크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66.6%였다. 3년 전인 2019년(56.2%)보다 10.4%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반면 카드업계는 거꾸로다. 간편결제 시장에서 카드사들의 비중은 2019년 43.8%에서 33.4%로 낮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주 수입원인 가맹점 수수료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줄고 있는데, 간편결제의 등장으로 이를 핀테크 기업들과 나눠야 하는 구조가 고착하고 있는 것이다.
핀테크 기업의 일평균 간편결제 규모도 2019년 1687억원에서 지난해 4104억원까지 증가했다. 3년 새 하루동안 금융소비자가 핀테크 기업을 통해 간편결제를 이용하는 규모가 143.3% 늘어난 것이다.
특히 국내 오프라인 간편 결제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삼성페이의 오프라인 누적 결제액은 2015년 8월 출시된 지 약 7년여 만에 219조원(올해 2월 말·누적 기준)을 넘겼다. 출시 1년 만에 누적 결제 금액 2조원을 넘긴 뒤 매년 1.5배씩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빅테크가 주도하는 선구매후지불(BNPL) 서비스의 확산도 카드사 입지를 위축시킨다. BNPL이란 약자 그대로 '지금 사고(Buy Now) 나중에 결제(Pay Later)하는' 방식이다. 당장 현금·신용카드가 없어도 상품을 우선 결제한 후 나중에 갚는 일종의 '외상거래'다. KDB미래전략연구소는 "BNPL시장은 오는 2030년까지 연평균 44% 수준의 성장세를 지속할 것"으로 전망했다.
신용카드를 발급받지 못하는 Z세대(1990년 중반~2000년대 초 출생)를 겨냥한 BNPL은 국내서도 늘고 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파이낸셜이 최초로 2021년 2월 금융위원회로부터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받아 4월부터 BNPL 서비스를 시작했다. 일부 카드사들이 BNPL시장을 두드리고 있지만 시장 주도적 지위와는 거리가 멀다.
결제시장 하청업체 될라…혁신 안간힘
핀테크 기업들의 간편결제시장의 성장은 카드사들에는 결제시장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을 넘어 생존 문제다. 만일 이대로 간편결제 시장에서 카드사의 비중이 계속 쪼그라들면 결국 카드사들은 간편결제 플랫폼에 상품 일부를 입점하는 하청업체로만 전락할 위기에 놓일 수 있다.
이런 위기감은 카드사들의 디지털 전략으로 나타나고 있다. 카드사들은 일단 네이버·카카오 등 빅테크들의 '원 앱' 전략에 대응해 기존 카드 앱을 속속 중단하고 페이(pay) 앱으로 서비스를 일원화하고 있다. 기존 카드 앱이 카드사들의 홈페이지를 단순히 모바일로 옮긴 수준인 데 비해 페이 앱은 간편결제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특징이다.
박지홍 하나금융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카드업은 기존 회원을 넘어 비회원과 가맹점으로 고객 기반을 확대하고, 종합금융 및 데이터 기반 비즈니스로 수익을 창출하는 생활금융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며 "상품 중개플랫폼 사업을 본격화해 데이터 기반 사업과 제휴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위원은 아울러 "카드사 입장에서 쉽지 않은 건 맞지만 빅테크와 경쟁하려면 자체 플랫폼의 강화 전략이 추진돼야 한다"며 "단순히 신용판매뿐만 아니라 금융을 종합적으로 중개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1위 신한카드, '디지털 월렛' 진화
카드사들은 자체 플랫폼을 키우는 전략을 우선 펼치고 있다. 업계 1위 신한카드의 앱 '신한pLay(플레이)'는 국내 최대인 회원수를 기반으로 가장 넓은 결제 서비스를 갖추는 방식의 디지털 접근법을 택했다. '가맹점과 모바일 기종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결제할 수 있는 플랫폼'이 강점이다.
김재훈 신한카드 플랫폼기획팀 부부장은 "신한pLay는 기존 신용·체크·선불뿐만 아니라 56개 금융기관 계정과 연결한 '계좌결제', 타 카드사 카드 탑재가 가능한 '오픈페이' 등 다양한 결제 수단을 담아 쓸 수 있는 종합 결제 플랫폼"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초(2013년)의 모바일 앱카드' 타이틀을 내세우는 신한pLay는 현재 회원 수가 1500만명, 1일 방문자는 200만명에 달한다. 올해 1분기 신한pLay 월간 활성화 이용자 수(MAU)는 831만명으로 지난 2019년(425만명) 대비 95.53% 늘어났다.
신한pLay는 송금과 자산관리, 상품 추천 등 금융 서비스와 고객 맞춤형 생활 콘텐츠도 제공한다. 기존 결제(신한pLay)와 상담(신한카드 앱) 기능으로 나눠 운영하던 앱도 지난해 6월 통합했다.
최근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오픈페이는 타사 신용카드 및 체크카드 사용뿐만 아니라 계좌이체나 선불카드, 서울사랑상품권 이용 등의 결제기능도 담았다. 동시에 휴대전화 '잠금 화면'에서도 위젯으로 꺼낼 수 있도록 해 결제 접근성과 편의성을 더했다.
신한pLay는 실물 지갑을 완전히 대체하는 디지털 월렛(지갑)이 목표다. 김 부부장은 "결제 수단뿐 아니라 모바일 신분증, 각종 증명서 발급 등 비결제 서비스도 담고 있다"며 "다른 결제업체들의 방향성도 비슷한 만큼 수년 내 '지갑 없는 사회', '캐시리스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내 넘어 해외서도…'원큐페이'의 DX
하나카드의 '하나 원큐페이(1Q페이)'는 '해외 결제망'에 기반한 디지털 역량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이 카드사는 국내 최초로 글로벌 브랜드인 비자(VISA) 및 마스터(Master)와 해외 근거리무선통신(NFC) 모듈 활용 제휴를 맺었다. 싱가포르·홍콩·런던·시드니·뉴욕 등의 도시가 있는 전 세계 100여개 국가에서 환전 필요 없이 휴대폰으로 손쉽게 결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나카드의 페이 서비스는 수많은 변천사를 거쳤다. 이벤트 정보를 제공하는 앱 '겟모어'로 시작한 하나카드의 페이 서비스는 '스마트페이', '모비페이', '모비박스'(마케팅플랫폼) 등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다. 간편결제가 지금만큼 활성화되지 않던 2014년부터 과감하게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설명이다.
하나카드는 지난해 4월 '원큐페이' 앱과 카드의 주요 서비스를 제공했던 '하나카드' 앱을 하나의 앱으로 통합해 다시 한번 변화를 꾀했다. 통합 앱에서 결제와 각종 조회·신청 등 핵심 서비스를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올해 1분기말 누적 가입자 수는 628만명으로 2019년말 312만6000명에서 배 넘게 늘었다.
유수길 하나카드 모바일사업부 부장은 "원큐페이는 미국, 영국, 호주 등 해외 현지에서 대중교통 이용 때도 별도의 교통카드 없이 결제할 수 있고 중국 은련(Union Pay) 가맹점에서도 QR결제가 가능하다. 법인카드 역시 출장 때 원큐페이로 사용할 수 있다"고 강점을 소개했다. 앱에는 국내외 폭 넓은 결제 기능 외에 △자산관리 △대출 △마이데이터 등의 서비스도 담겼다.
이 카드사 해외 특화 서비스로 '트래블로그'도 있다. 하나머니 앱을 통해 18종 외화 충전이 가능한 모바일 환전 서비스가 기반이다. 올해 5월 기준 달러, 엔, 유로부터 포린트, 루피아, 바트까지 무료(환율 100% 우대)로 환전할 수 있다. 충전한 외화는 트래블로그 체크카드·신용카드로 해외에서 사용할 수 있다. 해외 가맹점 결제 때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인출 때 수수료도 없다.
소소한 환테크도 할 수 있다. 원하는 환율일 때 외화를 충전할 수 있어서다. 김지윤 하나머니사업부 주임은 "통상 카드를 해외에서 쓰면 결제 시점의 환율이 자동 적용되지만 트래블로그는 외화가 저렴할 때 미리 매수했다가 실제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다"며 "목표환율 자동충전 같은 부가 기능도 넣어 사용 편의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트래블로그 서비스를 쓰는 이용자들은 '안전'도 높이 평가한다. 김 주임은 "현지 지폐를 환전해 직접 소지하고 다니다보면 분실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할 위험이 있는데 디지털로 환전된 외화머니는 이런 걱정을 크게 줄여준다"며 "환전의 번거로움을 덜고 여행의 안전을 더하는 데도 카드 서비스의 디지털 전환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