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툴젠의 '스텔스 모드(잠행)'는 이제 끝났습니다. 올해는 툴젠의 기술력을 '실질적인 재무 성과'로 증명하는 해가 될 것입니다."(유종상 툴젠 대표)
1세대 유니콘 바이오기업 툴젠이 2026년 병오년 새해,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 전날(6일) 열린 기업설명회(IR)에서 그간의 침묵을 깨고 글로벌 시장을 향해 '전면전'을 선포했다.
자신감의 배경에는 특허 기술이 있다. 툴젠이 보유한 유전자교정 전달기술인 'CRISPR-Cas9 RNP' 특허가 지난해 말 미국과 유럽에서 잇따라 등록됐다.
툴젠은 곧바로 세계 최초의 유전자 가위 치료제 '카스제비(Casgevy)'를 상용화한 버텍스 파마슈티컬스(Vertex Pharmaceuticals)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지식재산권 권리 확보에도 나섰다.
시총 1조 예비 유니콘 명암…'인고의 10년'
툴젠은 유전자 가위(Gene Editing)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국내 1세대 바이오 벤처기업으로 한국 바이오산업 역사에서 '애증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유전자 가위 분야 세계적인 석학인 김진수 전 서울대 교수가 1999년 창업한 툴젠은 1세대, 2세대, 3세대 유전자 가위 기술을 모두 보유해 주목을 받았다.
UC버클리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에게 노벨화학상을 안겨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 기술과 관련해선 툴젠과 미국 브로드연구소(MIT-하버드대), CVC그룹(UC버클리대) 3개의 그룹이 거의 동시에 개발, 2012년 원천 특허를 나란히 신청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글로벌 특허 분쟁 당사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변방의 바이오기업이 글로벌 '빅3'로 주목받자 기대감은 엄청났다. 2014년 코넥스 상장 이후 줄곧 대장주 자리를 지켰다. 유전자 가위 기술이 노벨상을 수상하며 주목받던 2020~2021년에는 시가총액이 1조원을 돌파하며 '예비 유니콘'으로 등극했다. 투자자들은 툴젠이 코스닥 이전 상장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회사 지배구조, 특허의 불확실성 및 권리 문제 등이 번번이 발목을 잡으면서 수차례 코스닥 이전 상장이 좌절됐다. 2019년 또 다른 바이오기업 제넥신과의 합병도 추진됐으나 좌절됐다. 결국 2020년 말 툴젠의 최대주주인 김진수 창업자가 물러나면서 제넥신으로 최대주주가 바뀌었다. 2021년 우여곡절 끝에 코스닥에 입성했지만 주가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채 하향 곡선을 그렸다.
남들 제품 내는데…아쉬움 남는 기다림
시장의 가장 큰 아쉬움은 '속도'와 '확장성'이다. 툴젠이 특허 소송 방어와 험난한 상장 과정에 매몰돼 있는 사이, 글로벌 경쟁사들은 특허 분쟁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공격적인 상업화에 나서 실제 '영토(제품)'를 넓혀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CVC그룹과 브로드연구소 진영은 '인텔리아', '에디타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 등 스핀오프 기업을 설립해 나스닥에 상장시키며 막대한 자금을 유치했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는 버텍스와 손잡고 2023년 세계 최초의 유전자 가위 치료제 '카스제비'를 상용화하며 시장을 선점했다. 나아가 이들 기업은 농산물이나 차세대 항암제(CAR-T) 등 다양한 임상에서도 속속 성과를 냈다.
반면 툴젠은 지식재산권(IP)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도 못했고, 자체 비즈니스화도 더뎠다. 차세대 CAR-T, 유전자교정 농산물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아직 뚜렷한 결과물이 나온 것이 없다.
툴젠의 주주들이 아쉬워하는 지점이다. 이날 툴젠의 간담회에 참석한 한 10년 차 주주는 "세계 최고 기술이라며 주목받을 때 경쟁사들은 임상 들어가고 약까지 만들었는데, 툴젠은 여전히 특허 싸움만 하고 있는 것 같아 허탈했다"며 "주가는 오히려 10년 전보다 후퇴했으니 '희망 고문'이 따로 없었다"고 격정을 토로했다.
반전 열쇠 '크리스퍼 RNP'…"미·유럽 특허 등록"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원천특허 소송을 둘러싼 세 그룹 간 치열한 공방으로 결론 도출이 지연되는 사이, 툴젠이 꺼내 든 반전 카드는 '크리스퍼 RNP(Ribonucleoprotein, RNA와 단백질의 복합체)' 특허다. RNP는 유전자 가위를 단백질 복합체로 직접 체내에 전달하는 기술로, 현재 상용화된 치료제들의 핵심 기술이다.
툴젠의 크리스퍼 RNP 기술 관련 미국 특허는 지난해 11월 19일, 유럽 특허는 12월 10일 각각 등록 승인 통지를 받았다. 툴젠은 특허 등록 전까지 상대방(버텍스, CVC 등)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스텔스 모드'를 유지해야 했다.
김유리 툴젠 부사장은 "최근 유럽 특허청이 버텍스 등의 이의신청을 기각하고 툴젠 RNP 특허의 진보성을 인정한 것은 결정적인 승리"라며 "경쟁사들이 2013년 당시 논문에서 DNA 전달 방식에 그칠 때, 툴젠은 세계 최초로 RNP 실험에 성공했다"고 강조했다.
경쟁사들이 소유권이 불분명한 원천특허로 사업화에 나섰다면, 툴젠은 확실하게 확보한 권리를 바탕으로 주장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마침 2017년 회사를 떠났던 김진수 교수도 지난해 기타비상무이사로 회사에 복귀했다.
"이제는 공격"…버텍스 소송 제기
방패를 내려놓은 툴젠은 곧바로 칼을 빼 들었다. 타깃은 세계 최초의 유전자 가위 치료제 '카스제비'를 판매 중인 시가총액 160조원 규모의 거대 기업 버텍스 파마슈티컬스다.
툴젠은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버텍스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유럽에서도 포문을 열었다. 카스제비의 위탁생산(CDMO)을 맡고 있는 론자(Lonza)가 위치한 네덜란드 법원에도 침해 소송을 제기하며, 생산과 판매 거점을 동시에 타격하는 전방위 압박에 나선 것이다.
시장에서는 경쟁사 에디타스(Editas)가 버텍스로부터 크리스퍼 특허 사용과 관련해 약 1500억원의 선급금과 연간 로열티 계약을 맺은 사례를 주목한다. 김유리 부사장은 "RNP 특허는 저촉심사 리스크가 없어 협상에서 더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수익 모델은 카스제비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툴젠은 이번 특허 경쟁력을 발판으로 동종 CAR-T(차세대 항암제), 유전자 교정 농산물 등 RNP 기술이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다양한 분야로 지식재산권을 주장해나갈 예정이다.
2026년, '만년 유망주' 꼬리표 뗄까
이날 설명회에서 김유리 부사장은 버텍스에 대해 "합리적인 회사"라고 수차례 이야기했다. 버텍스가 크리스퍼 RNP 특허 문제를 소송이 아닌 합의로 풀 것이라는 기대다. 그는 "버텍스와 아예 접촉이 없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툴젠이 버텍스와 크리스퍼 RNP 특허를 합의한다면 지식재산권 사업화에 물꼬가 트일 전망이다.
물론 낙관하기엔 이르다. 버텍스가 합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고 지난한 소송이 이어질 수도 있다. 합의 금액도 쉽게 예상하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실제 툴젠이 이야기하는 재무성과는 다시 미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유종상 대표는 "그동안 소송 전략상 웅크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불확실성이 걷혔다"며 "2026년은 툴젠이 보유한 세계적 기술이 실질적인 재무 성과로 연결되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잊혀진 유니콘' 툴젠이 IP 수익화라는 발판을 딛고 다시 비상할 수 있을지 업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