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바이오 업계에서 기업공개(IPO) 대신 기존 상장사와 합병해 증시에 진입하는 '역합병(reverse merger)'이 새로운 자금조달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임상에 실패하거나 사업을 축소한 바이오 기업의 상장 기반을 활용하는 동시에 대규모 기관투자를 유치하는 방식이다.
2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비상장 바이오기업 칼데라 테라퓨틱스는 최근 장외시장(OTC)에서 거래되는 신로직과 합병 계약을 체결했다. 두 회사는 새로 설립하는 지주회사의 자회사로 편입되며, 합병회사는 칼데라 테라퓨틱스라는 이름으로 나스닥 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칼데라는 합병과 동시에 기관 투자자로부터 2억7800만달러 규모의 투자도 유치했다. 조달한 자금은 염증성장질환 치료제 'CLD-423'의 궤양성대장염·크론병 임상 2상 등에 투입된다.
상장사 지분 2% 불과…실질 주인 '칼데라'
형식만 보면 두 회사의 합병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상장사 칼데라가 상장사인 신로직을 활용해 증시에 진입하는 방식이다.
합병 후 기존 칼데라 주주가 통합회사 지분의 62.8%를, 사모 투자자가 34.9%를 갖는다. 기존 신로직 주주 지분은 2.3%에 그치고, 경영진과 이사회도 칼데라 측 인사로 채워진다.
신로직은 합성생물학 기반 치료제를 개발해온 바이오기업으로, 2024년 페닐케톤뇨증 치료제(SYNB1934, 성분명 라바페노진 마르셀레코박) 임상 3상을 중단한 뒤 인력을 90% 넘게 줄이고 매각·합병 등 전략적 대안을 검토해왔다.
칼데라는 당초 올해 말 시리즈B 투자 유치를 계획했지만, 임상 경쟁 속도를 높이기 위해 역합병과 자금 조달을 선택했다. CLD-423은 염증성장질환과 관련된 TL1A·IL-23p19를 동시에 억제하는 이중항체다. 유사 기전을 개발하는 경쟁사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상장과 후기 임상 자금 확보를 한 번에 추진한 셈이다.
상반기에만 11건…IPO 대체제로 부상
이런 거래는 칼데라만의 사례가 아니다. 투자은행 윌리엄블레어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미국 바이오 업계에서 발표된 역합병은 11건에 이른다. 역합병이 IPO의 보조 수단을 넘어 주요 상장 경로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2분기에만 9건의 역합병이 나왔고, 이들 거래에 딸린 동시 자금 조달 규모는 약 16억달러에 달했다. 과거 역합병이 자금난 기업끼리의 결합으로 여겨졌다면, 최근엔 임상단계 파이프라인과 대형 바이오 투자자를 확보한 기업들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4월에는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사 코르사나가 나스닥 상장사 사이클러리온과 합병하며 3억8000만달러를, 옵시디언 테라퓨틱스는 OTC 기업 갈레라 테라퓨틱스와 합병하며 3억5000만달러의 자금을 유치했다.
5월에는 편두통 치료제 개발사 멘타리 테라퓨틱스가 나스닥 상장사 인메드와 합병하며 2억9000만달러를 확보했다. 6월엔 항암제 개발사 아벤조 테라퓨틱스가 랠리바이오와 합병하며 2억1500만달러를 조달했다.
"변동성 큰 IPO보다 확실성이 장점"
바이오기업들이 역합병을 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금조달의 확실성이다. 일반 IPO는 수요예측 과정에서 기업가치와 공모가격이 정해지는데, 시장이 나빠지면 공모가나 조달 규모를 낮춰야 하고 최악엔 상장을 철회할 수도 있다.
반면 역합병은 합병 계약을 맺기 전에 비상장사·상장사 가치, 기존 주주 지분, 자금조달 규모를 미리 협상할 수 있어 필요한 자금과 운영기간을 사전에 확정할 수 있다.
상장사 입장에서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임상 실패로 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회사는 청산 대신 유망한 비상장 바이오의 지분 일부를 확보할 수 있다. 비상장사는 일반 공모 없이 공개회사 체계와 기관투자 자금을 한 번에 얻는다.
다만 역합병이 심사 없는 '지름길'은 아니다. 칼데라와 신로직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합병 증권신고서를 제출하고 양사 주주 승인을 받아야 하며, 새 지주회사도 나스닥 신규상장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IPO보다 만나는 투자자가 적어 상장 후 주주 기반이 좁을 수 있고, 기존 상장사의 잠재 채무·소송 위험을 떠안을 가능성도 있다. 합병과 자금조달이 예정대로 종결되지 않으면 상장과 자금조달이 모두 무산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