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일해야 하면 회사를 관두겠습니다”
'파괴적 혁신'으로 유명한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M. Christensen)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지난 1979년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일할 때였다. 상사는 그에게 주말에 나와서 일할 것을 요구했고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일과 삶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은 가족, 일요일은 종교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게 철칙이었다.
선진국에서는 주어진 시간에 효과적으로 일하고 초과 근무는 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야근’이 일상화된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 직원들은 불만이 크다. 이들이 혀를 내두르는 한국의 기업문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 '대나무숲'에 울려퍼지는 숨겨진 진실
미국의 취업 정보 사이트 글래스도어는 현재 근무 중이거나 전(前)직원들이 기업에 대해 솔직한 리뷰를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까지 550만 개의 리뷰가 등록돼 있다.
글래스도어는 ‘투명함’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모든 리뷰가 익명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차마 대놓고 하지 못하고 속에 담아왔던 회사에 대한 뒷담화를 이 곳에서 마음껏 발산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 나오는 ‘대나무 숲’의 실사판인 셈이다.
평점은 ▲기업문화와 가치 ▲일과 삶의 균형 ▲상사(관리자) ▲보상과 복지 ▲경력 기회 등 5가지 부문으로 나뉜다. 경력기회는 자신의 경력을 활용해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길 기회를 말한다. 리뷰어가 각 부문에 1점부터 5점까지 점수를 매기면 누적 평점과 합산돼 해당 기업 페이지 첫 화면에 노출되는데 매우 불만족(1)부터 매우 만족(5)까지 1~5점의 평점이 매겨진다.
▲ 글래스도어 내의 페이스북 리뷰 페이지 |
◇ 구직순위 100위 안에 든 삼성전자, 평점은 꼴찌
지난해 말 글래스도어는 링크드인에서 구직자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으로 꼽은 회사 100곳에 대해 평점을 발표했다. 그 결과 연봉이 높고 복지가 잘 갖춰진 유명 글로벌 기업들이 상위에 랭크됐다. 점수가 가장 높은 곳은 페이스북(4.6)이었다. 트위터, 베인앤컴퍼니, 구글 등 이미 좋은 기업문화로 유명한 회사들도 이름을 올렸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삼성전자가 유일하게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평점은 2.7로 100대 기업 평균 점수인 3.6에 한참 못 미쳤다.
▲ 2013년 링크드인의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중 글래스도어 평점 Top10 기업 |
글래스도어가 평가한 국내 기업의 평점은 어떨까. 국내 40대 대기업 평점 평균은 3.2점으로 중소기업을 아우른 전 세계 30만개 기업의 평균 수준(3.2)이다. 국내에서는 연봉이 비교적 높고 복지가 잘 갖춰져 있는 대기업들이 글로벌 기준으로는 그저그런 회사라는 것이다.
▲ 글래스도어에 오른 국내 40대 기업 평점 (2014년 5월 기준) |
◇ 일 처리는 비효율적..상사는 꽉 막혀
한국 기업에서 일해 본 외국인 직원들은 ‘일과 삶의 균형’ 부문에서 대체로 낮은 점수를 줬다. 바로 ‘야근’ 때문이다. 외국인 직원들은 한국에서는 보편화된 야근에 대해 대부분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들은 하루에 너무 오랜 시간 회사일에 매달리다 보니 개인의 삶이 뒷전으로 밀렸다고 말한다.
외국인 직원들 사이에서 한국인들의 비효율적인 시간 관리(time management)는 유명하다. 한 외국인은 "왜 할 일이 끝났는데도 상사가 먼저 퇴근해야만 집에 갈 수 있냐"고 반문한다. 할 일이 없는데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현실을 ‘책상 데우기(desk warming)’라며 비꼬기도 했다. 제대로 쉬지 못하니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발현되지 못하고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기도 어렵다는 불만도 쏟아졌다.
▲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힌 한 외국인이 지난 2012년 자신의 블로그에 한국의 비효율적인 직장 문화를 비판하는 글과 함께 사진을 실었다. 사진에는 “한국, 열심히 일하지만 똑똑하게 일하지는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
외국인 직원들은 한국의 직장 문화가 꽉 막히고 경직됐다는 점에 대해서도 자주 경악한다. 상사와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받지 못하고 아예 대꾸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 회사를 ‘군대’에 비유하기도 한다. 시키는 일만 하는 한국의 직장 문화가 군대처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한국에서 4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다고 밝힌 마이클 코켄은 자신의 블로그(http://thesawon.blogspot.kr)에 "한국 기업은 위 아래 사람들 간의 상명하달식 의사소통과 엄격함으로 악명 높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바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중국계 호주인 이반 펑(27, 애널리스트) 씨는 “확실히 서구식 기업 문화가 더 수평적"이라며 "상사에게 직책보다는 이름을 부르며 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따뜻한 정(情)·멘토식 후배 챙기기는 장점
물론 따뜻한 ‘정(情)’이 스며들어 있는 직장 문화는 외국인 직원들이 한국 기업 특유의 장점으로 꼽는 부분이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직장 동료를 ‘가족’처럼 대한다고 말한다.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은 물론 주말에도 함께 여가 활동을 즐기며 친목을 다진다는 것이다.
‘선후배 문화’ 역시 한국만이 가지는 독특한 직장 문화로 소개됐다. 외국에서는 선배가 후배에게 일방적으로 밥이나 술을 사지 않는다. 후배를 ‘맡아서 가르쳐야한다’는 책임 의식도 없다.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일을 가르쳐 주기는 하지만 이 역시 ‘업무’로 여긴다. 선배가 후배를 붙잡고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고 충고하는 기업문화가 그들에게 신선하게 보이는 것이다.
깔끔하고 쾌적한 업무 환경, 식사비와 교통비를 지원해 주는 복지제도 등에 대해서는 만족도가 높았다. 미국 유럽의 글로벌 기업에 비하면 낮지만 아시아권에서는 연봉을 비교적 많이 주는 것도 장점으로 꼽혔다.
결국 외국인들은 한국 기업 안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수직적인 조직문화와 과도하게 업무지향적인 문화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신경 써야할 대목이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지위, 연봉 등 외적인 조건은 아무리 좋아도 그저 불만이 없는 상태를 만들 뿐"이라며 "사람들은 상사로부터의 인정, 도전적인 일거리, 책임감 등 내적인 조건이 충족됐을 때 더 열심히 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