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일가 사익편취 이른바 일감몰아주기를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현대기아차가 만든 자동차를 배에 실어 나르는 해상운송업체 현대글로비스를 ‘일감몰아주기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30억원이 2조원으로 바뀐 글로비스
현대차로선 다소 억울할 법도 하다. 글로비스가 만들어지고 맹활약하던 2000년대 초반은 이미 삼성이 에버랜드(현 삼성물산)·삼성전자 전환사채(CB) 카드로 먼저 치고나가면서 대기업 승계에 대한 감시의 눈높이가 높아져 있던 상황이었다. 현대차가 들이밀 카드 한 장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일감몰아주기의 원조 격을 굳이 찾아보더라도 글로비스 이전에 SKC&C(현 SK)가 있었다. 최태원 회장이 SK그룹 지주회사 (주)SK 대주주로 존재할 수 있는 핵심 이유였던 회사다. 그 무렵 다른 대기업에서도 일감 받아 성장하는 후계자의 개인회사가 스멀스멀 생겨났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대기업 현대차에 주어진 사회적 책임의 무게감은 어느 대기업보다 현대차 총수일가와 글로비스에게 엄격한 일감몰아주기의 책임을 물어왔다.
글로비스가 일감몰아주기의 상징이 된 또 하나의 배경은 정의선 부회장에게 안겨준 천문학적인 자본이득이다. 정 부회장은 17년 전인 2001년부터 2년간 총 30억 원을 투자해 글로비스 지분 59.85%를 확보했다. 30억 원의 종자돈은 이후 두 차례의 지분 일부 매각으로 8280억원(2004년 850억원·2015년 7430억원), 수년간 현금 배당으로 2200억원(2013년~2017년) 등 1조480억원이라는 현금을 정 부회장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지금도 정 부회장은 1조1000억 원(지분율 23.29%)짜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자본이득과 현 지분가치를 더하면 2조1500억 원. 17년 전 30억원이 이렇게 바뀐 것이다.
▲ 지난달 21일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 철회를 발표하기 직전,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정의선 부회장./이명근 기자 qwe123@ |
◇꺼내든 카드 그러나 쓰지못한 카드
정 부회장은 자신에게 '화수분'이었던 글로비스를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낼 마지막 카드를 지난 3월 꺼내들었다.
현대모비스의 AS부품·모듈 사업을 떼어내서(분할) 현대글로비스와 합치는(합병)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분할·합병을 완료한 후 자신의 글로비스 지분과 기아차·현대제철 등 계열사가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을 주고받으면 명실상부 20년 순환출자와 이별을 고하는 동시에 그룹 지분구조의 정점 현대모비스 대주주로 설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안이었다. 글로비스가 없었다면 애초 시도할 수도 없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카드는 아직도 정 부회장의 손끝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바꿔말하면 글로비스가 정 부회장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글로비스가 만들어질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삼성물산 합병 사태를 겪은 시장의 눈높이는 높아져 있었고 정 부회장이 꺼낸 카드에 반대했다. 급기야 정 부회장은 '시장의 견해와 고언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검토하겠다"며, 다시 자신의 손으로 카드를 접었다.
◇정 부회장이 다시 꺼내들 카드에 무엇이 담길까
정 부회장은 국내 재계서열 2위 현대차그룹의 황태자로서 지금까지 걸어오는 동안 기아차 디자인경영 등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고 국제무대를 넘나드는 경영능력을 입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대기업 후계자들보다 경영능력면에서 호평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동시에 우리사회에 진 빚도 적지않다. 정 부회장이 현재 가진 부(富)와 승계자금 대부분은 일감몰아주기 논란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비스 뿐만 아니라 정 부회장의 자금줄이었던 현대엠코(현 현대엔지니어링), 본텍(지분매각), 현대오토에버, 이노션은 한결같이 일감몰아주기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정 부회장은 2004년부터 2년간 그룹의 건설일감을 맡은 현대엠코에 375억 원을 투자해 지금까지 476억 원의 자본이득(배당)을 얻었고, 여전히 지분가치 8200억 원(합병 후 현대엔지니어링 장외시세 기준)짜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자본이득과 현 지분가치를 더하면 14년 전 375억 원이 8670억 원으로 바뀐 것이다. 가히 글로비스와 함께 양대 승계자금원이라 할 수 있다.
전장부품 계열사였던 본텍 투자금 15억원은 555억원(지분매각대금)으로 돌아왔고, 그룹 광고를 도맡았던 이노션 12억 원의 투자금도 4000억원의 지분매각대금과 배당금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모인 자금 중 일부는 정 부회장이 기아차(1.74%), 현대차(2.28%) 지분을 매입하는데도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감몰아주기를 '굴 파기'(Tunneling)라고도 한다. 다른 주주나 직원들은 모르게 그들만이 거래하는 땅굴을 판다는 의미다.
글로비스와 엠코, 본텍, 이노션, 현대오토에버는 그룹계열사와 안정적인 거래를 통해 성장한 비상장회사이며 정 부회장이 회사 설립 초기부터 지분을 대량 보유한 곳이다. 비상장회사 주식은 아무나 찍어내거나 살 수 없다. 계열사로부터 안정적인 매출처가 있는 비상장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어느 회사가 일감몰아주기로 안정적 성장을 해왔다면 그들에게 일감을 몰아준 회사에 투자한 주주들은 그 사실을 몰랐거나 알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또 누군가로부터 일감을 독과점적으로 받아온 회사가 있다는 것은 비슷한 사업을 하는 다른 누군가에겐 일감 더 나아가 일자리가 줄어드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갈수록 일감몰아주기를 엄격한 잣대로 평가하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요구한다.
정 부회장이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글로비스란 카드.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카드를 언제 다시 꺼내들지 예측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섣부르다.
다만 머지않은 시간에 다시 꺼내들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은 명확하다. 그때 정 부회장은 사회에 진 빚을 함께 해소할 합리적 방안을 제시하며 새로운 시대의 경영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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