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로 3개월 넘게 하늘길이 막히면서 국내 항공업계가 고사 위기에 몰렸습니다. 항공사 임원들은 임금을 반납했고, 직원들은 기약을 알 수 없는 무급 휴직에 들어갔습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보다 주기장에 세워둔 비행기가 더 많습니다. 줄이고 줄였지만 항공사들은 매달 2000~3000억원의 고정 비용을 내야합니다.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은 형국입니다. 3개월 넘게 버티고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이 가장 당혹스러운 건 바로 항공사 수장들일 겁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만 해도 취임 1년 만에 아버지 세대 때도 본 적 없는 사상 초유의 위기를 맞았고,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LCC 수장들 역시 마찬가지일겁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목전에 두고 있는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장고에 들어간 것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대한항공은 정부 지원과 함께 자체 자금수혈 방안을 모색중입니다. 오는 13일 이사회를 통해 논의될 유상증자 역시 그 일환입니다.
대한항공은 이날 이사회에서 구체적인 증자 규모와 일정, 방식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최소 5000억원에서 최대 1조원 규모의 주주배정 방식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증자 규모가 1조원이라면 대한항공 역대 최대 규모입니다.
조원태 회장이 주도하는 대한항공의 자구노력은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지원받는 배경이 됐습니다. 업계 1위 대한항공이 선제적인 자구 노력에 나서자 공적 금융기관들이 위기 상황을 인지하고, 적극 지원에 나선 것이죠.
그 결과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대한항공에 운영자금 2000억원을 지원하고, 7000억원 규모의 화물 운송 관련 ABS와 전환권 있는 3000억원 규모의 영구채를 인수하는 등 총 1조2000억원 규모의 신규 자금을 지원키로 했습니다.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유상증자와 공적자금 투입이 문제없이 진행되면, 대한항공은 최대 2조2000억원 규모의 유동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통상 유상증자를 하게 되면 유입되는 자금만큼 자본이 늘면서 부채비율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유증 규모가 1조원이라면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은 작년 말 871.5%에서 641%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여전히 높지만,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는 수준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이번 유증이 주주배정 방식으로 진행되면 대한항공은 '지배구조 안정'이라는 효과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대한항공의 현재 주주 구성을 보면 한진칼이 29.96%으로 최대주주고, 국민연금이 11.50%으로 2대 주주입니다. 여기에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3000억원의 영구채를 인수하면, 대한항공 지분 10.8%를 확보하게 되면서 3대 주주로 올라서게 됩니다.
각 주체들의 증자 참여 여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만일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주주로서 대한항공 유증까지 지원할 경우 상대적으로 한진칼과 국민연금 등 기존 다른 주주들의 지분율이 낮아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경영권 분쟁이 한창인 한진칼이 설령 최대주주인 '3자 연합(KCGI·반도건설·조현아)'에 넘어간다고 해도 대한항공을 온전히 손에 쥐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대한항공 최대주주인 한진칼은 주주배정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영권 분쟁이 치열한 가운데 대한항공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지는 상황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장 한진칼의 자금여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대한항공 유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하거나, 차입을 하거나 아니면 한진칼 역시 유상증자를 통해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합니다.
아직 한진칼이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는 미지수지만 확실한 백기사만 있다면 '3자 배정 유상증자'를 선택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기존 주주가 아닌 조 회장에게 우호적인 제 3자만 확보된다면 조 회장 본인과 3자 연합의 지분율이 줄겠지만 우호지분을 늘어나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3자 연합이 지분 추가 매입을 통해 반격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이들 역시 여력이 충분치 않습니다. KCGI는 주식담보대출 만기들이 다가오고 있고, 이를 상환하거나 연장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무직 상태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도 자금 사정이 넉넉치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반도건설은 자금력은 충분하지만, 본업인 건설업 외에 한진칼 주식 매입에 계속 자금을 투입하기도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지금 한진칼이나 대한항공이 처한 상황은 위기임에 틀림없지만 만일 이들 회사의 유상증자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경영상황이 호전된다면 유동성 위기 해소와 함께 조 회장 체제의 지배구조 안정이 가능할수도 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유상증자 카드가 조 회장과 한진그룹에게는 오랜 시간 이어져온 경영권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묘수가 될수도 있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