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현대자동차 이사회 의장에 오른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지난달 삼성SDI 천안사업장에서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을 만난데 이어 이달엔 LG 구광모 대표와 손을 잡으며 재계 오너 3~4세들과 '전기차 배터리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그간 재계 수장들이 사업을 위해 단독 회동을 가진 적이 드물었단 점을 감안하면 정 수석부회장의 이례적인 행보는 재계의 '핵 인사이드'(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을 일컫는 은어)로 떠올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국내에서 소모적인 신경전을 벌이기보단 글로벌 무대에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재계 3~4세들이 실리를 택했다는 분석이다.
◇ 115km 떨어진 배터리 공장 방문
22일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LG화학 오창공장에서 구광모 대표를 만났다. 정 수석부회장은 현대차그룹에 전기차 베터리를 공급하는 LG화학의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미래 배터리 기술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현대차그룹 양재사옥에서 115km가량 떨어진 충북 청주시 LG화학 오창공장을 정 수석부회장이 직접 찾은 것은 전기차의 위상이 그만큼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세계 자동차 시장이 내연기관차에서 친환경차로 급변하면서 자칫 이 시기를 놓치면 미래차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글로벌 전기차 전문 매체인 EV세일즈에 따르면 올 1분기 순수 전기차 판매량 1위는 미국의 테슬라(8만8400대)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3만9355대), 폭스바겐그룹(3만3846대), 현대·기아차(2만4116대) 등이 그 뒤를 쫓고 있지만 기존 내연기관차 회사들은 테슬라의 질주를 막지 못하고 있다. 테슬라의 시가총액은 르노-닛산, 폭스바겐, 현대·기아차의 시가총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다.
업계에선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애플이 핸드폰 시장의 패러다임을 스마트폰으로 바꾼 것처럼, 전세계 자동차 생산망이 셧다운된 이번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테슬라의 전기차가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현대차그룹도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현대차는 2025년까지 전기차 56만대를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수소차를 포함해 친환경차 세계 3위에 오른다는 '중장기 계획'이다. 이를 위해선 배터리 기술력 확보가 우선이다.
내연기관차의 '심장'이 엔진이었다면 전기차의 핵심 부품은 배터리다. 빨리 충전되고 한번 충전으로 오래 달릴 수 있는 배터리를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에 따라 미래차 시장 경쟁의 승부가 갈릴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내년 양산하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Electric-Global Modular Platform)'의 2차 배터리로 LG화학의 '고성능 리튬 이온 배터리'를 채택했다. 올 1~4월 LG화학은 전세계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25.5%) 1위를 차지하며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날 LG화학은 현재 배터리보다 5배 이상 오래 쓸수 있는 '장수명(Long-Life) 배터리', 가격은 낮추면서 주행거리는 늘린 '리튬 황 배터리' 등 새로운 배터리 기술을 정의선 수석부회장 등 현대차그룹 일행에게 소개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2025년까지 44종의 친환경차를 선보이겠다는 방향을 잡은 상황에서 전기차 배터리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커질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 젊은 재계 3~4세들 직접 만난다
최근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동선'을 보면 어느 때보다 경영보폭이 넓어지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실리 경영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지난달 정 수석부회장은 충남 천안에 위치한 삼성SDI 천안사업장을 찾아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을 만났다. 이번 달 17일 양재사옥에서 열린 '현대차그룹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 센터' 건립 협약식에선 조현식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부회장과 함께 했다. 핵심 사업이 아닌 '사업 협약식'에 오너들이 직접 참석해 악수를 나누는 것도 흔치 않은 모습이다.
이들은 오너 3~4세로 최근 들어 경영권 전면에 나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3월 부친인 정몽구 회장으로부터 현대차 이사회 의장직을 물려받았다. 이날 보도자료에선 구광모 대표로 나왔지만 구 대표도 2018년 LG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나이도 이재용(1968년생), 정의선·조현식(1970년생), 구광모(1978년생) 등 40~50대로 젊은 편이다. 부친들이 국내 시장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던 것과 달리 이들은 세계무대에서 협력 체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업계 관계자는 "그간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전경련이나 청와대 초청 모임 등에서 만났지, 이번과 같이 사업을 위해 단독 회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며 "대기업간의 지속적인 협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