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한 무명의 디자이너가 토리노 모터쇼에서 차 한 대를 선보였다. 너무 비싸지 않아 중산층이 탈 수 있으면서 꿈을 꾸게 하는 차. 그는 이 생각을 도면 위에 그려냈고 한 무명의 자동차 회사는 콘셉트카를 만들었다. 하지만 양산(대량 생산)에 실패했다. '불운의 명작'으로 불리는 현대차의 포니 쿠페는 그렇게 사라졌다.
지난 21일 '불운의 명작' 디자인을 기반에 둔 아이오닉5를 시승했다. 반세기에 가까운 47년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무명의 자동차 회사는 글로벌 톱 5위에 올랐고 무명의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세계적인 거장이 됐다. 하지만 아이오닉5의 기반이 된 47년 전 디자인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꿈꾸게 하는 영감을 주고 있었다.
◇ "미래로 가지만 과거를 존중"
아이오닉5 첫인상은 소박했다.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E-GMP)이 처음으로 적용된 전기차인 만큼 디자인에 힘을 주고 싶었을 테지만 화려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47년 전 클래식한 디자인을 기반에 두고 있다. 전조등과 후미등 등에 적용된 '파라메트릭 픽셀'만이 미래적인 감성을 더해 주고 있었다.
지난 2월 이상엽 현대차 디자인담당 전무는 아이오닉5에 대해 "미래로 가지만 과거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과거와 미래가 묘하게 섞여 쉽게 질리지 않을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차 문을 열 때부터 많은 것이 새롭다. 스마트키를 들고 가까이 다가가면 매끄럽던 차문에 숨어 있던 '오토 플러시 도어 핸들'이 튀어나온다. 시동을 걸면 전기차 특유의 조용함이 어색했다. 시동이 걸렸는지 계기판을 들여다보게 된다. 길게 뻗은 '12인치 클러스터와 12인치 인포테인먼트' 화면의 디자인은 '최첨단'을 자랑하지 않는 인상이었다. 사진을 찍어 동료에게 전송했더니 "전자책 같은 계기판"이라는 답이 왔다. "애플스러우려 애쓴 태가 난다"는 평도 있었다.
'디지털 사이드 미러'도 낯설다. 외부 카메라와 연결된 실내의 모니터가 '사이드 미러' 역할을 했다. 카메라로 보여지는 사이드 미러에는 사각지대가 없었다. 대신 차선을 변경할 땐 처음 접하는 방식에서 오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차선 변경을 위해 좌우 깜빡이를 켜면 모니터에 끼어들 공간을 표시해 주는 두 줄의 빨간 선이 떴다. 공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띠 띠' 경고음이 울렸다.
내부 공간은 기대만큼 넓지 않았다. 지난 2월 이상엽 전무는 "공간 혁신의 정점을 보여주는 차"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기존 내연기관보다는 넓은 공간을 확보했지만 '혁신의 정점'이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연기관의 센터 콘솔 자리에 위치한 '유니버셜 아일랜드'는 스마트폰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공간만큼 뒤로 밀렸다. '유니버셜 아일랜드'를 뒤로 밀고 동승자 자리로 넘어가봤다. 내연기관차보다는 편했지만 그렇다고 이동이 수월했던 것은 아니었다.
◇ 빨리 치고 나가고, 절도 있게 멈춘다
이날 시승은 스타필드 하남에서 출발해 현대EV스테이션 강동에서 전기를 충전하고 남양주시에 위치한 더드림핑을 돌고 오는 코스다.
충전소까지 가는 시내주행에선 모터가 달린 전기차 특유의 응답성이 느껴졌다. 액셀을 밟는 대로 치고 나갔다. 차선변경이 수월했다. 5.2초에 불과한 아이오닉5의 제로백(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걸리는 시간)이 실감이 났다. 응답성보다 인상적인 것은 브레이크의 제동력이었다. 절도 있는 제동력이 안정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충전소에서 15kWh의 전기를 초고속 충전하는데 8분이 걸렸다. 충전 요금은 4485원. 스타필드 하남에서 출발할 때 55%였던 배터리 잔량은 충전 후 70%까지 올라왔다.
현대차가 공개한 아이오닉5의 스펙을 보면 초급속 충전으로 배터리 용량 80%를 충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8분이다(유럽 인증 WLTP 기준). 회사 측의 설명보다 충전속도가 느린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50%까지는 최대 속도로 충전하고 50~80% 구간엔 전력량을 살짝 낮춘다"며 "배터리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충전소 건물에는 커피숍 등이 함께 입점해 있어 시간을 때우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바쁜 출근 시간에 18분을 기다린다고 생각해보니 조바심이 훅 느껴졌다. 더욱이 충전소에서 차를 댈 때 주차선에 딱 맞춰 차를 대지 않으면 충전이 어려웠다. 충전기의 커넥트와 연결된 '전기선'이 딱딱해 이동이 쉽지 않아서다.
◇ 우린 피처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고속주행로에 오르니, 시내주행 만큼의 응답성이 느껴지진 않았다. 시속 100km 이상부터는 기름을 태워 가속하는 내연기관 차에서 보던 폭발력은 없었다. 아이오닉5의 최고 시속을 185km로 제한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고속주행감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속 120km 이상 밟아선 안되는 국내 도로 상황을 감안하면 충분해보였다.
시내에서 멀어지자 배터리 용량에 신경이 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주변에 전기 충전소가 있는지 살펴보게 됐다. 전기차의 배터리 용량이 획기적으로 늘거나 충전 인프라가 촘촘히 깔리기 전까지 해결하기 쉽지 않은 불안감일 것이다. 이날 87km를 달린 롱레인지 전륜구동(2WD) 모델의 전비는 5.7km/kWh. 회사 측이 밝힌 복합전비(4.9km/kWh)보다 좋게 나왔다.
시승을 끝나고 나니 미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가 떠올랐다. 2019년 미국의 소비자단체인 컨슈머리포트가 50만명의 차량 소유자를 대상으로 자신이 소유한 차를 다시 재매구할 의향이 있냐고 물었는데, 테슬라 모델3의 재구매율이 90%가 넘었다고 한다. 한 발 앞선 자율주행 시스템 등을 갖춘 테슬라에 대한 충성도를 보여주는 결과이겠지만, 넓게 보면 전기차 맛을 본 소비자는 다시 내연기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로도 해석될 것이다.
스마트폰을 처음 써본 때를 기억해 보자. 우린 다시 피처폰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