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 치매(이하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은 '난공불락'의 영역으로 꼽힌다. 아직 발병 원인도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데다 임상 실패율이 99.6%에 달한다. 글로벌 제약사(빅파마)도 중도에 개발을 포기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잇단 실패에도 기업들은 도전을 지속하고 있다. 빅파마뿐만 아니라 바이오벤처도 새로운 플랫폼(기술)을 접목하거나 조기 진단기기를 개발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치매 정복에 나섰다. 관련 치료제 개발 현황과 달라진 치료 접근법 등을 짚어봤다. [편집자]
전세계 알츠하이머 신약 개발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빅파마가 개발 중인 알츠하이머 치료제의 임상3상 결과가 속속 공개되면서다. 다만, 같은 기전으로 개발 중인 치료제의 임상 결과가 엇갈리게 나오면서 발병 원인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국내 기업들은 개발 속도는 느리지만 새로운 플랫폼 등을 활용해 시장 공략에 나섰다.
바이오젠 vs 릴리, FDA 허가 속도전
5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알츠하이머임상학회(CTAD)에서 빅파마들이 알츠하이머 치료제의 최신 임상 결과를 공개했다. 이번 학회에서 바이오젠·에자이, 일라이릴리(이하 릴리) 등이 개발 중인 치료제의 효능 입증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바이오젠과 에자이가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는 '레카네맙'은 신약 후보군 중 개발 속도가 가장 빠르다. 바이오젠·에자이는 알츠하이머로 인한 경도 인지장애 또는 경도 치매 환자 1795명을 대상으로 임상3상을 진행한 결과 레카네맙 투여 18개월 후 1차 평가지표인 임상 치매 척도(CDR-SB)가 위약군보다 27% 개선됐다고 밝혔다. CDR-SB는 기억, 방향성, 판단 및 문제 해결 등 6개 영역의 인지 기능을 평가하는 척도다.
다만, 뇌부종과 뇌출혈 등 부작용도 보고됐다. 레카네맙을 투여한 환자의 12.6%에서 뇌부종이, 17.3%에서 뇌출혈이 발생했다. 여기에 임상에 참여한 환자 중 두 명이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안전성 우려가 커졌다. 사망 환자는 모두 뇌경색 후 혈전용해제를 복용해 온 환자였다. 바이오젠·에자이 측은 레카네맙이 사망 원인과는 관련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이번 결과를 토대로 내년 1월 6일께 레카네맙의 시판 허가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도나네맙'을 통해 레카네맙을 바짝 뒤쫓고 있는 릴리는 이번 학회에서 알츠하이머 치료제 '아두헬름'과 직접 비교(헤드투헤드) 임상 결과를 내놨다. 아두헬름은 지난해 6월 FDA 조건부 허가를 받은 바이오젠과 에자이의 신약이다. 릴리 측은 "초기 환자 148명을 대상으로 투약 6개월 뒤 뇌 속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의 제거 효과를 측정한 결과 도나네맙의 단백질 제거율이 37.9%로, 아두헬름(1.6%)보다 높게 나타났다"고 했다. 다만, 해당 비교 임상은 환자 수가 적고 주요 평가지표에 CDR-SB 등이 포함되지 않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앞서 릴리는 임상2상에서 1차 평가지표인 통합 알츠하이머 평가 척도(iADRS)가 위약군보다 32% 감소, 효능을 입증했다고 밝힌 바 있다. iADRS는 알츠하이머에 주로 사용하는 인지 척도와 일상 기능 척도를 복합 측정하는 것이다. 도나네맙의 임상3상은 내년 3월 마무리된다. FDA는 도나네맙을 신속심사 대상으로 지정, 현재 심사를 진행 중이다. 내년 상반기 FDA가 시판 허가 여부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로슈는 임상 실패…'베타' 가설 무너지나
로슈가 개발 중인 알츠하이머 치료제 '간테네루맙'은 효능 입증에 실패했다. 로슈가 CTAD에서 공개한 세부 임상 결과에 따르면 간테네루맙은 1차 평가지표인 CDR-SB의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경도 인지장애 혹은 초기 치매 증상이 있는 환자 1965명을 27개월 이상 관찰한 두 차례 임상3상에서 CDR-SB 수치가 기준치보다 0.31점, 0.19점 감소했지만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제거 수준은 예상보다 낮았다.
시판 중인 아두헬름을 포함해 레카네맙, 도나네맙, 간테네루맙은 모두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을 타깃으로 개발하고 있는 후보물질이다. 알츠하이머의 정확한 발병 기전이나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신경세포 바깥에 단백질 찌꺼기인 아밀로이드 베타가 쌓이면 주위 세포의 순환을 방해해 질병을 유발한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알츠하이머로 사망한 환자를 부검한 결과 이들의 뇌에서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발견된 점이 해당 가설의 근거다. 그러나 같은 기전 치료제의 임상 결과가 엇갈리게 나오면서 아밀로이드 베타 가설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는 상황이다.
사실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로 알츠하이머 치료가 어렵다는 건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로 꼽힌다. 지난 7월엔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알츠하이머의 핵심 발병 원인이라는 이론의 논거가 됐던 논문이 조작 의혹에 휩싸이며 학계를 뜨겁게 달궜다. 아두헬름 역시 18년 만에 FDA 허가를 받은 치매 치료제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상 실패한 약물로 평가받는다. 효능과 부작용 논란 등이 이어지면서 미국 공공의료보험은 아두헬름의 보험 적용을 제한했다. 결국 바이오젠·에자이는 아두헬름의 상용화를 위한 비용을 삭감하고 유럽 허가 신청을 취소하는 등 개발을 포기한 상태다.
특히 전문가들은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생성과 알츠하이머 발병의 인과 관계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알츠하이머 환자 중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침착이 없는 환자나, 단백질이 쌓여도 알츠하이머 증상을 보이지 않는 환자가 보고되면서다. 실제 아두헬름도 알츠하이머 환자의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을 효과적으로 제거했음에도 증상이 개선된 환자는 22% 정도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당시 업계와 학계에선 FDA의 허가로 알츠하이머의 발병 원인을 규명하는 게 오히려 어려워졌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이제껏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을 표적으로 개발됐던 치료제의 성과도 좋지 않았다는 점도 의구심을 키우는 요인이었다. 릴리는 2016년 '솔라네주맙'의 임상3상에 실패하면서 개발을 중단한 바 있다. 로슈도 지난 6월 '크레네주맙'이 상염색체 우성 알츠하이머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3상에서 1차 평가지표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솔라네주맙과 크레네주맙 모두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을 표적한다. 이선경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아밀로이드 베타가 최적의 타깃인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라며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제거율을 높이는 게 인지 기능 개선 효과로 이어질지에 대해선 현재까지 부정적"이라고 분석했다.
블루오션 알츠하이머 시장, 국내도 '도전장'
잇단 논란에도 국내외 기업들은 치료제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다. 세계적으로 고령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등 뇌 질환 환자는 증가한 반면 관련 시장을 선점한 기업이 없어 개발 성공 시 '잭팟'을 터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알츠하이머 시장은 오는 2030년 약 17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후발주자인 국내 기업들은 다중 기전의 치료제를 개발하거나 자체 개발 플랫폼을 접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장 공략에 나섰다.
국내 기업 중 임상 속도가 가장 빠른 곳은 젬백스와 아리바이오다. 젬백스는 펩타이드 기반 알츠하이머 치료제 'GV1001'의 국내 임상3상, 다국가 임상2상을 진행 중이다. 회사는 지난 10월 GV1001의 다국가 임상을 미국에서 유럽 7개국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한 번의 임상으로 미국과 유럽 시장에 동시 진출할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아리바이오는 하나의 약물로 2개 이상의 표적 부위에서 효과를 내는 다중기작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를 적응증으로 한 'AR1001'은 FDA 임상2상을 마치고, 최근 미국 임상3상에 돌입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자체 개발한 '그랩바디-B' 플랫폼을 활용해 알츠하이머 등 뇌질환 치료제를 개발할 예정이다. 그랩바디-B는 뇌 질환 치료제가 뇌혈관장벽(BBB)을 침투하도록 돕는 기술이다. BBB는 세포벽이 두꺼워 약물이 투과하기 어려운데, 그랩바디-B를 이용하면 아밀로이드 베타를 표적하는 약물을 뇌 안까지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밖에 디앤디파마텍, 차바이오텍, 메디프론 등의 국내 기업이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었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선 아직 알츠하이머 치료제의 절대 강자가 없는 만큼 국내 기업들도 충분히 시장 경쟁력을 보유했다고 보고 있다. 알츠하이머 신약을 개발 중인 국내 바이오 기업 관계자는 "과거엔 아밀로이드 베타 침착을 치매의 주요 원인으로 봤지만 연구가 거듭될수록 베타 단백질 상호작용, 타우 단백질, 혈관 병변, 신경염증 등 치매 발병 기전에 대한 가설이 많아지고 있다"면서 "가설이 많다는 건 그만큼 여러 가능성과 시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로, 치매 치료제에 대한 개발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