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은 피했지만
미국 정부가 반도체과학법 가드레일(안전장치) 세부규정을 최종 확정했습니다. 이번 가드레일 최종안의 핵심은 ‘미국 보조금을 받는 반도체 기업은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을 10년간 5%를 초과 증설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는 1년에 0.5%씩 공장시설을 늘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상 증설이 아닌 현상 유지에 가깝습니다. 지난 3월 공개된 초안의 내용과 비슷한 수준에서 확정된 건데요.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최악은 피했지만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다”고 평가합니다.
‘최악은 피했다’고 보는 배경은 이렇습니다. 최근 중국 화웨이가 7나노 공정 스마트폰을 출시하며 기술 자립에 나서면서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제재가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초안이 유지된 것만 해도 선방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력 제품이 첨단 반도체임을 고려하면 중국 내 생산 전략 변경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초안 발표 이후 우리 정부가 ‘10%’로 늘려달라고 지속적으로 미국 정부에 요청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절반의 아쉬움과 절반의 안도감
미국 정부는 반도체법 상 보조금을 받는 기업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량 확장 범위를 초안대로 확정했습니다.
향후 10년간 중국 내 생산시설에서 첨단 반도체는 5% 이상, 범용(레거시) 반도체는 10% 이상 증설할 수 없다고 규정했죠. 레거시 공정은 △28나노 이상 시스템 반도체 △128단 미만 낸드플래시 △18나노 초과 공정의 D램을 뜻합니다.
현재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메모리 생산량의 40%를 중국 시안 공장에서, SK하이닉스는 D램 생산량의 40%를 중국 우시 공장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양사는 미국의 보조금을 수령한 후 10년간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시설을 5%까지만 늘려 생산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의 이번 조치로 우리 기업들의 중국 내 사업 확대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장은 반도체 업황이 좋지 않아 큰 영향이 없겠지만 업턴을 맞았을 때 수익성에 타격이 있을 것이란 분석입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가드레일’이라는 그 자체가 비즈니스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라 우려가 된다”며 “반도체 불황기엔 증설 제한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있으나 향후 업황 및 중국 경기가 살아나면 수익성에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도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최신 기술이 보다 중요한데 첨단 반도체 증설 기준이 ‘5%’인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면서 “경제 성장률과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감안해 한국 정부·업계가 10%를 바랐는데 5%로 결정이 난 것은 안타깝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10만달러’ 이상으로 적시된 거래 한도 액수가 삭제된 부분에 대해선 긍정적 반응이 나옵니다.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향후 10년간 우려국에서 반도체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10만달러’ 이상의 거래를 할 경우 보조금 전액을 반환해야 한다’는 초안 내용 가운데 액수 한도가 없어진 겁니다.
10만달러는 한화로 약 1억3000만원 정도입니다. 이 조항 때문에 기업들은 사소한 장비 수리비까지 신고해야 하는 등 상당히 번거로워질 뻔했었는데요. 다행히 한도가 삭제되면서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업계의 생각입니다.
“중국 장비반입 연장 여부 관건, 최소 2년 이상”
전문가들은 “중국 내 장비반입 유예 연장 여부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최소 2년 이상은 연장이 돼야 실질적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란 분석입니다.
반도체 특성상 장비 업그레이드가 전제돼야 제품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인데요. 기존 장비를 그대로 사용하면 성능의 한계가 있을뿐만 아니라 수율이 떨어지고 제품의 원가가 올라가는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앞서 미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미국 기업이 중국에 첨단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했습니다. 구체적으로 △16나노미터(㎚) 이하 시스템 반도체 칩 △18㎚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 플래시 생산 가능 장비가 대상입니다.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중국에 생산 거점을 둔 한국 기업들은 1년 한시적 유예조치를 받았죠. 유예기간은 오는 10월로 종료됩니다.
박 교수는 “통상 기존 반도체 장비로는 최장 2~3년간 제품을 생산해낸다”며 “시장이 요구하는 반도체 성능이 매년 올라가기 때문에 장비 업그레이드는 필수”라고 말합니다. 이어 “최근 반도체 장비는 발주를 넣은 후 생산, 반입까지 약 2년이 걸린다”면서 “때문에 미국 정부가 저번처럼 1년 유예 연장을 해버리면 한국 기업 입장에선 경영 계획을 세우기가 상당히 힘들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반도체 전문연구원은 “최근 화웨이 7나노칩 등 미중 테크전쟁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미국의 규제 강화 움직임이 예상됐는데 초안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며 “다만 장비 반입 규제만큼은 무기한 유예가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고 적어도 2년 이상은 유예를 해줘야 한국 기업들의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미국 정부가 빠르면 이번 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대한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무기한 유예 조치’를 통보할 것으로 전해져 이목이 쏠립니다. 이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사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실제로 미국 현지 등에서는 미국 상무부가 한국 기업들에게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방식을 적용해 향후 수출통제를 사실상 무기한 유예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VEU는 일종의 ‘통합 라이센스’입니다. 미국 상무부에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사용할 반도체 장비 목록을 제출하고 이에 한해서는 별도 허가 없이 자유롭게 장비를 반입하는 방식입니다. 이번 미국 정부의 가드레일이 최종적으로 우리 기업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