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반도체 업계가 천국과 지옥을 오갔습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말 바꾸기' 때문이죠.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지면 젠슨 황의 말 한마디에 롤러코스터를 탄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우리나라 경제의 주축으로 자리잡은 반도체 업계가 시장 주도권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각 사의 기술 경쟁력 제고 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지원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평가입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무슨일이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지난 6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CES2025에 참석해 엔비디아의 핵심 상품군 중 하나인 GPU(그래픽처리장치)의 새로운 시리즈 GeForce RTX 50 Blackwell을 발표했습니다.
핵심은 젠슨황 CEO가 이 자리에서 RTX 50 시리즈에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의 GDDR7 칩이 사용한다고 밝히면서입니다. 이후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GDDR7칩을 만들지 않는다"라고까지 발언했죠.
GDDR7, 즉 DRAM시장에서 압도적인 기술 경쟁력과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아쉬움을 넘어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섣부르게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엔비디아라는 거대 파트너사의 의중을 읽어야 했으니까요.
이후 젠슨 황 CEO가 발언을 소폭 정정하면서 상황은 점차 진정됩니다. 젠슨황 CEO는 이후 성명을 통해 "RTX 50 시리즈에는 마이크론 뿐만 아니라 다양한 파트너사들의 GDDR7 제품이 포함된다"고 밝혔습니다. 이후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회동하면서 양 사간의 협력관계가 여전히 견고한 것도 다시금 알려졌죠. ▷관련기사 : 'AI의 새 물결' 선언한 젠슨 황…삼성·SK 언급 없었다. 1월 7일
젠슨황의 의도는 뭐였을까
젠슨황 CEO의 발언 이후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된 모습이지만 여전히 왜 그런 발언을 했는가를 두고는 뒷말이 무성했습니다.
이번에 젠슨황 CEO가 콕 찍어 언급한 GDDR7 칩의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때어놓고는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 반도체 거물의 입지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DRAM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은 60%를 넘어 서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필수 부품 공급을 우리나라 두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죠. 심지어 삼성전자의 경우 GDDR7을 가장 먼저 개발한 기업입니다.
따라서 젠슨 황의 발언에는 의도가 담겨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란 분석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미국 정부의 '눈치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습니다. 미국은 조만간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두번째 정권이 시작됩니다. 트럼프 당선인이 강력한 보호 무역위주의 정책을 펼칠 것이라 관측되는 가운데, 핵심 사업군인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이 아닌 타국 기업과 돈독한 관계를 보이는 것은 자칫 미운털이 박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울러 엔비디아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시장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란 평가도 있습니다. 세계 굴지의 파트너 기업들을 '배제'할 수 있는 엔비디아의 위상을 확인시켜준 계기가 됐다는 겁니다. 발언을 정정하기는 했지만 '마이크론 칩 사용'이라는 그의 최초 발언에 대한 주목도가 워낙 높았으니까요.
'해프닝' 취급해서는 안되는 이유
따라서 이번 일은 며칠간의 해프닝이라고 치부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당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향한 투자심리가 달라진 점이 대표적입니다. 젠슨황 CEO가 RTX 50 시리즈에 마이크론의 칩이 들어간다고 단언한 날(7일) 삼성전자의 주가는 5만5400원으로 마감했습니다. 전일 5만5900원보다 0.89% 빠진 겁니다. 같은기간 SK하이닉스의 주가 역시 19만9800원에서 19만5000원으로 2.4% 빠졌죠.
엔비디아가 전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이긴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업가치가 젠슨 황의 입에 매번 크게 휘청이는 것은 그간 지나치게 우리 반도체 업계에 후한 평가를 준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옵니다. 위상이 예전만 못해진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의 재현을 막기 위해서는 두 기업의 연구 개발 등을 통해 기술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제도적으로도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는 말이 꾸준히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현재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반도체 특별법인데요. 반도체 특별법은 반도체 분야에서 일하는 인력이 주 52시간 이상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인데, 기업들이 근로자들과 협상해 더 많은 시간을 연구개발에 할애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반도체 산업은 HBM처럼 만들기 복잡하고,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래 기업은 물론 국가의 기간산업이 될 것이란 판단아래 세계 각국에서 정부차원에서 지원에 나서며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죠.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전 세계에서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