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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팀목 vs 도움안돼' 30년 증안기금의 역사

  • 2020.04.06(월) 15:02

[증시 안정판 증안펀드 가동]
1990년 처음 등장, 증시안정기금이 모태
日 벤치마킹, 조달·운용 방식 등에서 논란

정부가 증시 안정을 위해 조성한 증권시장안정펀드(이하 증안펀드)는 1990년에 나왔던 '증시안정기금'을 모태로 한다.

증시안정기금은 당시 급락하는 증시의 버팀목 역할을 했으나 증시가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식 시장의 정상적인 흐름을 막고 주가를 인위적으로 조정했다는 관치금융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 30년 전 증안기금, 일본 사례 벤치마킹

증시안정기금은 국내 증시가 장기 침체기에 빠진 1990년 5월8일 정부 주도로 출자해 만든 기금이다. 당시 25개 증권사를 주축으로 은행과 보험사 등 금융회사를 비롯해 일반 상장 기업 등 총 627개사가 총 4조8600억원을 출자했다.

이 기금은 과거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했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초 증시가 침체 늪에 빠지자 일본공동증권과 증권보유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주식을 대거 매입, 주가 상승을 유도했다. 이후 본격적인 대세 상승기에 접어들자 이를 매각하면서 해산한 바 있다.

1985년부터 대세 상승장이 시작한 국내 증시는 '3저 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을 타고 1989년까지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러다 그해 코스피 지수가 1007포인트(4월7일)를 찍더니 갑자기 고꾸라졌다.

88올림픽이 끝난 이후 3저가 퇴조하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두자릿수에서 한자릿수로 내려왔으며 경상수지가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하는 등 경기가 가라 앉았기 때문이다.

주가 거품이 꺼진데다 유상증자와 기업공개로 인한 주식 공급물량이 과잉으로 넘쳐나면서 수급의 균형이 깨졌고 주가가 급락했다. 1989년 12월 코스피 지수가 850선 밑으로 떨어지는 등 8개월 만에 20% 가까이 폭락했다.

◇ 안정대책으로 증안기금 카드, 6년만에 해산

당시 이규성 재무장관은 1989년 12월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써서라도 주식매입 자금을 무제한 특별융자해 줄테니 투신사가 앞장서서 주식을 매입하라'며 이른바 '12.12 증시안정대책'을 발표했다.

이 조치 이후에도 정부는 실명제 실시를 무기한 연기하고 부동산 투기 방지책을 발표하는 등 증시부양을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내놓았으나 주가 급락을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

다급해진 정부는 1990년 5월8일 증시안정기금 카드를 꺼내들었다. 증권사에 은행과 보험사 등 금융회사로부터 3조원 뿐만 아니라 상장기업들(1조원)까지 동원해 총 4조원 규모 기금을 조성, 증시에 투입했다.

증안기금은 1992년말까지 4조원 가량의 주식을 사들였으나 당초 기대했던 만큼의 증시부양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3년 기한으로 설립한 증안기금의 존속 기한을 3년 추가로 연장했다.

다행히도 1993년말부터 증시가 저절로 활황세에 접어드는 바람에 코스피가 900선 회복(1994년 1월27일 종가기준)하자 증안기금 매도를 시작했고 1996년 5월에 해산했다.

◇ 상장사 팔 비틀어 자금 조성

증안기금은 자금 조성 과정 및 운용 방식 등에서 부작용을 낳았다. 증안기금에 출자한 상장사에는 세제 혜택을 준 반면 출자하지 않은 기업의 증자 및 사채 발행을 막았다. 상장사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억지로 출연했다.

주가를 인위적으로 조정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대한민국 금융잔혹사(저자 윤광원)'란 책에 따르면 정부 관계자가 증안기금을 운용하는 실무자에게 직접 지시, 전화로 매수할 종목 이름을 불러주고 얼마씩 사라고 하는게 관행이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기금을 동원했다는 의혹도 나온다. '한국을 뒤흔든 금융권력(저자 윤재섭)'에 따르면 증안기금은 1992년 3월24일 총선 때 선거일을 앞두고 주식을 대거 매수해 시세를 띄우더니 총선 다음날 주가가 폭락했을 때 시장에 개입하지 않아 총선용으로 기금을 사용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증시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부작용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증안기금이 구원투수로 나섰음에도 코스피 지수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2년 8월 코스피 지수가 456포인트까지 급락하면서 증안기금의 손실도 불어났다.

돈을 빌려다 주식을 산 일부 투신사는 자본금이 전액 잠식되며 부실회사로 전락했고 증권사도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다. 기금이 해산한 뒤에도 청산금 배분을 놓고 소송전이 벌어졌는데 2010년에야 최종 정리됐다.

◇ "증시 폭락 위기 막아줘", 긍정적 평가도

증권가에선 증안기금은 1990년대 초반 증시 폭락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줬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한금융투자는 최근 보고서에서 증안기금의 가장 빛나던 시기는 1990년 10월10일 이른바 '깡통계좌 일제 정리' 때라고 소개했다.

당시 일반 투자자들은 주가가 빠질 대로 빠졌으니 이제는 올라갈 것이란 기대감으로 신용투자에 매달렸다. 신용으로 매수한 주식은 신용만기가 다가오면 매도 압력으로 작용해 오히려 주가를 하락시키는 요인이 된다.

주가 하락은 다시 신용융자 담보비율의 부족을 일으켜 반대 매매를 불러일으키고, 반대매매는 또 다시 주가하락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1990년 9월 17일 기준으로 전체 증권사에 마이너스 잔고인 깡통계좌(담보유지비율이 100% 미만인 계좌)수가 1만6000개나 되고 부족금액도 2000억원에 이르러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이에 금융당국은 10월10일을 기해 깡통계좌를 일시에 반대매매하기로 했는데 증안기금은 반대물량 1312억원을 흡수하면서 증시 안전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최유준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증안기금은 실물경기 침체가 이어지던 1992년 12월까지 악성 매물을 소화하며 4조원 넘게 순매수했다"라며 "관치금융 논란과 잠재 매물 부담이 있었지만 급락시 매수, 과열시 매도하며 시장 안정을 도모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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