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투자신탁운용은 스스로 '펀드 베테랑'을 자청할 만큼 국내 자산운용업계에서 펀드 강자로 이름을 날려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시장의 대세로 거듭난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서는 펀드시장에서의 입지를 생각하면 존재감이 비교적 미미한 편이었는데요.
그랬던 한투운용이 본격적으로 ETF 시장에서의 영역 확장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지난해말 삼성자산운용에서 ETF 사업을 이끌었던 배재규 신임 대표를 영입한 건데요.
순혈주의 기조가 강했던 한국투자금융그룹이 외부 인재를 계열사 사장으로 앉힌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한투 운용이 ETF 시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투운용은 국내 ETF 시장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 배 대표를 수장으로 앉힌 만큼 그의 행보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요. '펀드 베테랑' 한투운용은 배 대표와 함께 'ETF 베테랑'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국내 ETF 시장 일궈낸 'ETF의 아버지'
한투운용의 배재규 대표 영입은 단연 지난해 말 자산운용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중 하나였습니다. 배재규 대표는 'ETF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데요. 지금으로부터 무려 20년 전인 2002년 황무지와 같았던 국내 시장에 ETF를 들여온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도 2009년에 인버스 ETF를, 2010년에는 레버리지 ETF를 국내 최초로 내놓으면서 현재의 국내 ETF 시장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죠. 삼성자산운용에서 배 대표가 주도해 만들었던 'KODEX ETF'들은 지금도 국내 ETF 시장에서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국내 최초의 ETF인 'KODEX 200' ETF가 대표적인데요. KODEX 200은 23일 기준 5조5109억원의 순자산가치를 보유해 출시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국내 최대 규모의 ETF입니다. 2위인 TIGER 차이나전기차SOLACTIVE ETF(3조2485억원)보다 2조원가량 큰 규모인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압도적인 규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ETF시장을 키운 대표 인물을 그동안 순혈주의 기조가 강했던 한투운용이 영입하자 시장의 이목은 집중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 한국투자증권지주 계열사 사장에 외부인사가 임명된 것은 20여년만이라는 전언입니다.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한투운용, 커지는 ETF 시장서 '제자리걸음'
한투운용이 배 대표를 영입한 이유는 당연히 ETF 시장에 힘을 주기 위해서일 텐데요. 한투운용은 그간 ETF보다는 공모펀드에서 강점을 보여왔습니다. 국내 최초의 투자신탁 회사답게 전통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다양한 공모펀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때 설정액이 2조원이 넘으며 10년이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투자네비게이터' 펀드를 비롯해 최근에도 좋은 실적을 내고 있는 '한국투자글로벌전기차&배터리펀드', '한국투자미국배당귀족펀드' 등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최근 투자자들이 펀드를 통한 간접투자보다 직접 투자를 선호하는 추세를 보이면서 펀드의 인기는 시들해진 반면 ETF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2020년말 52조원 규모였던 국내 ETF 시장은 지난해 말에는 74조원 규모로 커졌습니다.
한투운용도 시장의 흐름에 맞춰 본격적으로 ETF 사업 강화를 위해 배 대표를 영입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한투운용이 그동안 ETF 시장에서 부진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삼성자산운용과 함께 ETF 시장의 역사를 함께 해왔던 점을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입니다.
국내 ETF 시장은 현재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2강 체제가 강화되면서 KB자산운용과 한투운용 등이 뒤를 쫓는 모양새입니다.
2020년말 기준 52%였던 삼성운용의 ETF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말 42.5%까지 하락했습니다. 반면 미래에셋운용은 같은 기간 25.3%에서 35.5%로 점유율을 끌어올리면서 삼성운용이 20년간 지켜온 철옹성을 넘보고 있습니다.
3위 KB운용도 2020년말 기준 6.5%였던 시장 점유율을 지난해 7.9%로 높이면서 성장세를 보였는데요. 4위 한투운용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4.7%에서 4.6%로 다소 줄어들면서 3위와의 차이가 벌어진 상태입니다.
액티브보다 패시브…차별화된 상품이 경쟁력
배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 3위 KB운용을 따라잡고 나아가 삼성운용, 미래에셋운용과의 격차를 줄여야 하는 중책을 맡았는데요. 지난 22일 취임 기자간담회를 통해 배 대표의 전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배 대표는 이날 간담회에서 "운용업의 대세는 액티브에서 패시브로 넘어갔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축소되면서 액티브 운용으로는 초과수익을 내기가 어려워진데다 다양한 지수와 테마 상품이 등장하면서 패시브 운용의 장점이 부각됐다는 건데요. ETF 시장에서도 패시브 ETF를 중심으로 한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비쳤습니다.
실제로 한투운용은 최근 액티브 ETF 전용 브랜드였던 네비게이터 브랜드 ETF를 모두 KINDEX로 통합하기로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그간 '네비게이터' 이름을 달고 운용하던 3개의 액티브 ETF의 이름을 모두 KINDEX로 바꾸는 건데요.
다만 패시브 ETF만으로는 운용의 경직성이 커질 수 있는 만큼 액티브 ETF를 적절히 활용해 경직성을 깨겠다고도 했습니다. 액티브 ETF를 통해 초과 수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운용에 유연성을 가져가겠다는 거죠.
이미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가지고 굳히기에 들어간 경쟁사들을 따라잡기 위한 전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ETF 시장에서는 브랜드 파워보다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차별화된 상품 개발을 통해 트렌드를 앞서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요.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경쟁사와 같은 전략으로는 격차를 줄이기 어렵다고 보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상품 개발을 통해 격차를 좁혀가겠다는 겁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ETF 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장기전이 될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배 대표는 "운용자산과 시장 점유율 등에서 향후 5년간 목표치를 세워둔 상태"라며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구체적인 운영 계획을 가지고 착실히 준비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과연 5년후 한투운용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빠른 속도로 변하며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ETF 시장에서 '1세대' 배 대표가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삼성자산운용을 절대 강자 반열에 올렸던 배 대표가 한투운용에서 그 영광을 재현할 것인지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