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권사들이 금리 인상 여파에 채권 운용에서 대거 손실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발(發) 긴축 기조와 인플레이션 파고에 기준금리가 뛰면서 채권값이 급락하자 보유 채권의 평가손실이 불어난 탓이다.
대형 증권사들의 경우 특히 전체 실적에서 채권 운용부문 비중이 작지 않아 타격이 더욱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가운데서도 일부 증권사는 선제적으로 대응해 실적을 방어하는 등 '투자 실력'을 입증했다.
한투, 채권운용 손실에 순익 급감…대형사 직격탄
2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국내 증권사 다수가 채권을 포함한 상품 운용부문에서 1000억원 이상의 큰 손실을 보거나 적자전환됐다. 특히 굴리는 금액 자체가 상대적으로 많은 대형 증권사의 경우 손실이 더 심했다.
한국투자증권이 대표적이다. 이 증권사는 2분기 채권운용에서만 약 1000억원의 손실을 봤다. 이에 전년 동기 1700억원에 이르렀던 운용부문 전체 수익이 마이너스(-) 876억원으로 적자전환됐다. 이 여파에 늘 선두를 다투던 실적도 맥을 못 췄다. 분기 순익이 1000억원에도 못 미쳐 대형사 중에서도 하위권으로 순위가 밀렸다.
하나증권도 이번 분기 채권운용을 포함한 트레이딩부문에서 1244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냈다. KB증권 또한 1113억원 상당의 상품운용 손실을 나타냈다.
손실금액이 1000억원까지는 안 되지만 이외 NH투자증권(-739억원), 키움증권(-629억원), 대신증권(-311억원), 삼성증권(-188억원) 등도 채권 등 상품운용에서 일제히 손해를 봤다. 모두 지난해 같은 기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실적을 기록한 증권사다.
국고채 금리 10년래 최고치…채권 평가손실 '눈덩이'
미국의 고강도 긴축으로 금리가 급등하면서 증권사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실제 국고채 3년물 금리는 2분기 막바지인 지난 6월17일 연 3.745%까지 치솟으며 2011년 8월4일(3.77%) 이후 10년여 만에 최고 수준을 썼다. 연초 대비로는 2%포인트 가까이 뛴 수치다. 국고채 1년물도 같은 달 30일 2.981%까지 올라 연초보다 1.6%포인트가량 상승했다.
이렇게 금리가 급등하면 채권값은 떨어지기 때문에 증권사들은 보유 채권의 평가손실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특히 업권 특성상 환매조건부채권(RP) 등 '단기'로 분류되는 자금의 조달 비중이 큰 증권사들은 시장금리가 상승할 때 차환(채권 재발행으로 기존 채권 상환) 리스크도 그만큼 커진다. 창구에서 판매하는 주가연계증권(ELS)과 파생결합증권(DLS)의 경우 그 규모에 비례해 채권을 의무로 보유해야 하기 때문에 역시 금리에 따라 손익이 갈린다.
이번 분기에는 금리 변동성도 상당했다. 증권사들이 채권 운용 포지션을 설정하는 데 애를 먹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란 관측이다. 박혜진 대신증권 연구원은 "지난 6월 20거래일간 금리 변동폭이 위아래로 0.1%포인트 이상 확대된 날은 5거래일이나 됐다"며 "운용이 상당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선제 대응 증권사는 선방…채권이 '실적 결정타'
한편 채권 운용 규모를 선제적으로 조정한 증권사들은 확실히 순익 감소폭이 타사 대비 작았다. 오히려 실적이 개선된 증권사도 나왔다. 채권이 증권사들의 2분기 실적을 가른 결정타가 된 것이다.
이번 분기 증권사 실적 1위를 차지한 미래에셋증권은 채권 등 상품운용부문에서 1100억원의 수익을 거뒀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로는 43%가량 감소한 규모지만 1000억원대 손실을 본 증권사가 여럿인 점을 감안하면 잘한 장사다. 이 증권사는 최근 1년간 평균 26조7250억원 수준이던 채권 잔고를 2분기 25조원까지 줄이면서 성과를 봤다.
현대차증권은 증권사 대부분이 반토막 실적을 낸 이번 분기에 오히려 순익이 늘었다. 역시 보유 채권을 줄이면서 평가손실을 최소화한 게 주효했다. 실제 2분기 채권잔고를 전년 동기 대비 25%, 직전 분기보다는 14% 이상 축소했다. 덕분에 분기 전체 순익이 18%가량 확대됐다.
다만 최근 국고채 3년물 금리가 3% 초반대로 내려오면서 3분기에는 증권사들의 채권 평가손실 부담이 완화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물론 인플레이션 부담 등에 금리 불확실성은 여전히 높다.
강승건 KB증권 연구원은 "최근 국고채 금리가 하락하면서 증권사들의 운용 환경은 훨씬 나아졌다"면서도 "다만 경기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금리 변동성도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홍재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2분기보다는 채권운용 관련 손실이 축소될 가능성이 크지만 미국에서는 최근에도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를 한번에 0.75%포인트 인상) 가능성 언급돼 관련 모멘텀을 기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