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강도 긴축과 인플레이션 파고는 중형 증권사들에게도 거세게 몰아쳤다. 모든 증권사에 예고된 부진이었지만, 실적 평균치는 전년 대비 반토막을 넘어 3분의 1 수준이 됐다. 겨우 흑자를 수성한 증권사, 아예 적자를 낸 증권사도 나왔다.
지수 급락으로 투자자들의 주식시장 이탈이 가속화하면서 증권사들의 가장 큰 수익원이던 위탁매매(브로커리지)가 맥을 못 춘 영향이 컸다. 대내외 불확실성에 안전자산으로 돈이 몰리면서 운용부문도 부진했고, 기업금융(IB)도 전반적으로 힘을 쓰지 못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역대급 유동성에 증권사들이 '실적 잔치'를 벌인 데 대한 역기저효과도 적지 않았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중형 증권사들의 실적 순위에는 큰 변화가 일었다.
23일 비즈니스워치가 자기자본 6000억원 이상 2조원 미만(작년 3분기 말 기준)인 12월 결산 국내 중형 증권사 13곳의 지난해 연결 실적을 분석한 결과 이들 전체 순이익은 4541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2021년 1조6094억원 대비 무려 70% 이상 급감한 규모다.
현대차증권, IB로 '껑충'…선두 뺏긴 다올
현대차증권은 이런 가운데서도 지난해 중형 증권사 중 실적 방어를 가장 잘 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까지만 해도 줄곧 실적 중위권에 머물던 이 증권사는 작년 871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거두며 중형사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전년 대비 순익 감소폭도 26.02%로 중형 증권사 중 가장 적었다. 영업이익은 1146억원을 내며 중형사 중 유일하게 1000억원대를 기록했다.
IB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한 게 주효했다. 분양시장 침체를 예상하고 물류센터, 오피스 같은 임대 가능 자산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조정한 것이다. 실제 지난해 1분기 송도H로지스 물류센터, 2분기 용인 남사 물류센터 매각 등 굵직한 딜을 성사시켰다. 매각규모는 각각 4380억원, 3170억원에 이른다.
현대차증권 관계자는 "유동성 경색으로 영업환경은 어려웠지만, IB 부문에서 사업 리스크 검토와 사후 관리를 병행하며 전체 수익을 방어했다"고 설명했다.
다올투자증권은 지난해 순이익이 전년 대비 53.40% 쪼그라든 820억원에 그쳐 현대차증권에 선두를 빼앗겼다. 이 증권사는 2021년 1761억원의 순익을 벌어들이며 중형 증권사 '톱' 자리에 올랐던 곳이다. 다올투자증권 측은 "금리인상에 따른 시장 변동성 확대로 이익이 감소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주 계열 증권사들의 실적도 반토막 나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400~500억원대의 순익을 내며 상위권을 차지해 체면치레를 했다. 먼저 BNK금융지주 계열 증권사인 BNK투자증권의 지난해 순이익은 전년 대비 50.60% 감소한 573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IBK투자증권도 순익이 53.26% 줄어든 471억원을 나타냈다. 이들 모두 비우호적인 시장 환경 탓에 자산운용 수익이 감소했다는 설명이다. 중형사 중에서는 나란히 3위와 4위다.
유안타·교보도↓…하이·이베스트 하위권 '뚝'
자기자본이 1조5000억원 내외로 국내 대표 중형사인 유안타증권과 교보증권도 맥을 못 췄다. 브로커리지와 운용 수익이 모두 감소하면서 작년 실적이 모두 반토막을 넘어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유안타증권은 지난해 순이익이 전년 대비 70.07% 감소한 450억원, 교보증권은 69.80% 줄어든 432억원에 그쳤다. 다만 다른 증권사들의 실적 감소폭이 워낙에 커 유안타증권은 실적 순위가 5위로 한 계단 올라갔고 교보증권은 6위 자리를 지켰다.
부국증권은 전체 사업구조상 자기매매 비중이 크고 브로커리지는 미미해 400억원대 순익을 냈다. 지난해 순이익은 전년 대비 45.30% 감소한 423억원이다. 덕분에 순위도 7위로 다섯 계단이나 뛰었다.
부국증권의 순위 상승에는 줄곧 중형사 상위권을 다투던 하이투자증권과 이베스트투자증권이 지난해 브로커리지 부진으로 순익이 급감한 영향도 있다. 두 증권사는 앞서 2021년 모두 1600억원대 순익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쓴 바 있다. 그러나 작년에는 하이투자증권이 전년 대비 77.07% 줄어든 375억원의 순익을, 이베스트투자증권은 81.52% 줄어든 297억원의 순익을 내는 데 그쳤다. 이에 순위도 각각 2위에서 8위로, 3위에서 9위로 떨어졌다.
특히 하이투자증권은 대손충당금 적립 영향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이는 특정 이벤트 발생에 따른 것은 아니다. 회사 관계자는 "부동산 경기침체에 따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대한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재무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몸집 1위' 한화투자, 패소 배상에 순손실
한화투자증권은 지난해 중형 증권사 중 유일하게 적자를 냈다. 이 증권사는 작년 3분기 말 기준 자기자본이 1조6688억원으로 중형사 중 가장 크다. 하지만 '몸집 1위'란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지난해 476억원 순손실을 봤다. 2021년 순익 1441억원에 비하면 급강하한 수준이다.
영업이익은 438억원 흑자였지만, 중국국저에너지화공집단(CERCG) 자산유동화증권(ABCP) 관련 항소심에서 일부 패소한 데 따른 배상액이 영업외손실로 반영돼 순손실로 이어졌다. 이 증권사 관계자는 "금리인상을 비롯해 대외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서도 리스크 관리에 힘써 영업이익 흑자를 유지했다"면서도 "다만 CERCG 항소심에서 일부 패소해 원고에게 배상액을 선지급하면서 순익이 적자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순이익이 10분의 1 토막 나면서 겨우 적자만 면한 증권사도 나왔다. SK증권이 지난해 전년 대비 96.74% 급감한 13억원의 순익을 기록한 것이다. 이 증권사는 영업이익도 15억원에 그쳤다. 회사 관계자는 "금리인상과 증시 부진 등 자산시장 침체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유진투자증권과 DB금융투자도 순익이 대폭 빠졌다. 지난해 유진투자증권은 167억원, DB금융투자는 125억원의 순이익을 내는 데 그쳤다. 100억원대를 수성한 수준이다. 전년 대비 감소폭은 각각 81.58%, 90.12%에 이른다.
이처럼 지난해 '실적쇼크'가 상당했던 만큼, 중형 증권사들은 올해 무엇보다 리스크 관리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외국인 투자자가 다시 순매수를 이어가며 지수가 조금씩 반등하고는 있지만, 미국의 1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급등하는 등 긴축 장기화 가능성은 여전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공급망 차질 등 대외 리스크도 현재진행형 변수다.
한 중형 증권사 관계자는 "시장 상황이 좋지 못할 때는 작은 리스크 하나도 실적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올해 증시도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커 자산건전성이나 유동성 관리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시장 유동성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올해도 브로커리지 위축을 각오하고 있다"며 "IB나 트레이딩 부문에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등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려고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