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경영권분쟁의 분수령인 임시주주총회가 열흘이 채 남지 않은 가운데 5% 의결권을 쥔 국민연금의 선택에 시선이 쏠린다.
관건은 집중투표제 도입에 대한 찬반 여부다. 특별결의가 필요한 정관변경 안건인데다가 '3%룰'(주주 1명당 의결권을 최대 3%까지만 사용하는 방식)을 적용하기 때문에 표면적인 지분율만 따져선 승부를 가늠하기 어렵다. 현재까지 관련 리포트를 낸 의결권 자문기관은 이 안건에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영향력 줄었지만 '집중투표 도입'에선 여전한 변수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위원회(수책위)는 오는 17일 회의를 열고 고려아연 임시주총 안건에 관한 주주권 행사 방향을 결정한다.
국민연금은 기금운용본부 내 투자위원회가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수책위 위원 3분의 1 이상이 주주가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판단해 회부를 요청할 경우 투자위원회는 의결권행사 권한을 수책위로 넘겨야 한다. 이번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 안건 역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수책위원들은 합의를 통해 안건별 의결권 행사 여부와 표결 방향을 결정할 예정이다.
치열한 경영권 분쟁 속 '캐스팅보터'로 떠올랐던 국민연금의 존재감은 이전보다 약해진 상태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에 우호지분으로 분류되는 의결권과 영풍·MBK 측 의결권 차이는 7.5% 내외이다. 따라서 국민연금은 작년까지만 해도 보유한 의결권 8.53%(작년 3월 기준)로 주총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캐스팅보터'로 꼽혔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지난 10월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 참여 등으로 지분율이 낮아졌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이 고려아연 주총에서 쓸 수 있는 의결권은 작년 3월말 8.53%에서 10월 28일 기준 5.15%(자사주 제외 의결권주식수 기준)로 낮아졌다. 아직 공시를 하진 않았지만 작년 11~12월 중 차익 실현을 위해 변동폭 1% 내로 추가 매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관련기사: 고려아연 캐스팅보트 대신 차익실현 택한 국민연금...현재 지분율은?(1월 10일)
그럼에도 여전히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경영권 분쟁에서 무시할 수 없는 변수로 남아있다. 이번 주총 핵심 안건인 '집중투표제 도입'의 표결방식 때문이다. 집중투표제는 이사회 구성원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1주당 선임할 이사수 만큼 표를 줘 원하는 후보에게만 몰아줄 수 있다. 이 제도는 이사회를 경영진이나 대주주에 우호적인 인물로만 구성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표적인 소수주주 보호 장치다.
고려아연이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려면 정관을 바꿔야 하는데, 이는 특별결의 안건으로 출석주주 의결권의 3분의 2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동시에 '3%룰'을 적용한다. 3%룰은 주주별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방식이다.
3%룰을 적용한다는 것은 3% 초과분을 '분모'에 해당하는 의결주식총수에서 제외한다는 의미다. 이 경우 최 회장 측 지분은 약 35%, 백기사로 분류되는 우호지분도 모두 집중투표제 도입에 찬성한다면 약 23%로 총합계 58% 수준이다.
이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최근 공시대로 의결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국민연금이 집중투표제 안건에 손을 들어주면 최 회장 측은 60%가 넘는 찬성표를 확보하는 셈이다. 이것만으로 집중투표제 가결(67%)을 확정할 순 없지만 한층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다. 반대로 국민연금이 집중투표제 도입에 반대할 경우, 영풍·MBK측(과 함께 반대 의결권을 29.7% 모아 집중투표제 도입 저지(33%) 가능성을 높인다. 엇갈리는 의결권 자문사…수책위원장은 '반대 의사'
우선 국민연금 수책위는 기본적으로 집중투표제에 우호적이다. 수탁자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에 따르면, 집중투표 배제를 반대하고, 도입(배제 조항 삭제)하는 안건에 찬성한다.
다만, 단서조항이 달려있다.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이러한 원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제도 도입으로 효능보다 부작용이 크다고 예상하는 등 근거가 있다면, 반대표도 던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한석훈 수책위원장은 집중투표제와 관련해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집중투표제는 상법상 '1주 1의결권' 원칙에 어긋나는 이례적 제도"라며 반대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수책위가 참고하는 주요 의결권 자문기관들의 입장은 엇갈렸다. 글로벌 자문기관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는 집중투표제 도입 안건에 반대를 권고했다. ISS는 "집중투표제는 통상 소액주주에게 유리한 것으로 간주한다"면서도 "이번 사례에선 영풍·MBK측이 추구하는 변화가 가져올 영향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국내 3대 의결권 자문기관 중 한 곳인 서스틴베스트는 집중투표제에 찬성을 권했다. 서스틴베스트는 집중투표제 도입과 관련해 "소수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경영 투명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두 곳 모두 '집중투표제 도입이 소액주주에 우호적'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집중투표제 도입이 가져올 영향을 다르게 평가했다. ISS는 영풍·MBK 측의 견제를 이사회 기능을 개선하려는 시도로 인정하고 집중투표제로 이사를 선임하는 것이 이사회 기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와 달리, 서스틴베스트는 집중투표제 도입 자체는 도움이 된다고 분석했다. '이사수 상한' 찬성 유력...이사선임은 면면 따질 듯
이사수 상한 설정도 수책위가 다뤄야할 안건 중 하나다. 수책위 지침에 따르면 이사회 내 위원회 활동을 제약할 만큼 이사 수를 제한하거나, 개별이사의 영향력을 무력화할 정도로 많은 이사를 두는 안에 반대한다. 해당 안건에 대해 자문기관들이 모두 찬성을 권고한 만큼 국민연금도 이 안건에 찬성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 안건 역시 특별결의 안건으로 이미 부결이 유력하다. 의결권을 3분의 1 이상 보유한 영풍·MBK 측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연금의 표결은 해당 안건 통과 여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가장 복잡한 변수 속에 놓인 이사 선임은 한쪽이 추천한 후보를 모두 지지하는 대신 후보 개인의 면면을 따질 것으로 보인다.
앞서 ISS는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 권광석 전 우리은행장, 손호상 포스코 석좌교수, 정창화 전 포스코홀딩스 미래기술연구원 원장 등 영풍·MBK측이 추천한 후보 4명에 찬성을 권고했다. 이 후보들이 이사회 독립성과 경영진에 대한 감독을 강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ISS는 집중투표제를 도입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4명의 후보에만 지지를 표한 이유에 대해 '기존 이사회 구성원 12명에 4명을 더해 16명으로 이사회 규모를 제한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현 경영진과 영풍·MBK 측이 각자 추천한 후보가 함께 이사회를 꾸림으로써 이사회가 현 경영진에 대응할 수 있는 대표성을 갖추고, 활발한 논의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서스틴베스트는 권광석 전 우리은행장, 손호상 포스코 석좌교수, 정창화 전 포스코홀딩스 미래기술연구원 원장, 김명준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김수진 전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 홍익태 전 국민안전처 해양경비안전 본부장 등 7명의 후보에 찬성을 권고했다. 모두 영풍·MBK 측이 추천한 후보다.
다만 서스틴베스트는 이번 경영권분쟁의 '키맨'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 강성두 ㈜영풍 사장은 찬성 권고 대상에서 제외했다. 특히 ISS가 지지한 김광일 부회장에 대해 '과다한 겸임'을 이유로 반대를 권했다. 고려아연이 추천한 사외이사 후보 7명 전원에 대해서도 경영진과의 독립성 문제를 지적하며 반대를 권고했다.
국민연금 수책위도 이들과 유사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사선임 관련 지침에는 △법령상 결격사유가 있는 자 △과도한 겸임으로 충실한 의무수행이 어려운 자 △기업가치나 주주권익 침해 이력이 있거나 감시 업무를 소홀히한 자 △회사 또는 계열사 재직시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활동에 따른 주주 요구를 거부한 자에 대해선 반대할 수 있다.
이번 주총처럼 이사 후보가 많은 경우, 중대한 결격사유가 없더라도 다른 후보에 비해 회사와 주주의 가치제고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적다고 본다면 반대표를 던질 수 있다.일부 안건 '기권' 또는 '중립' 가능성도
고려아연 경영권분쟁에 대한 관심도가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국민연금이 일부 안건에 '기권'이나 '중립'을 택할 가능성도 있다. 2018년 KT&G 주주총회(대표이사 선임안)와 2024년 한미사이언스 주주총회(정관변경, 기타비상무이사 선임, 사내이사 선임)에서 의결권 중립을 결정한바 있다.
기권은 의결권을 아예 행사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킨다. 반면, 중립은 국민연금을 제외한 나머지 주주들의 의결권 투표 비율을 본인들의 의결권 행사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A회사에 100개의 의결권이 있는데, 여기서 국민연금이 15개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나머지 85개의 의결권을 갖고있는 주주들이 모두 참석해 투표를 진행한 결과 B안건에 찬성이 45표, 반대가 40표 나왔다. 이 경우 중립을 택한 국민연금의 의결권은 찬성에 8개, 반대에 7개가 각각 반영된다. 국민연금이 특정안건에 중립 입장을 정한다면 해당안건에 대해서는 의결권을 더 많이 확보한 영풍·MBK 측에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