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한국 행정법원이 글로벌 SNS 페이스북의 접속경로 변경 행위에 대해 일종의 '면죄부'를 줬습니다.
'이용자 불편은 있었으나, 이용을 제한할 수준은 아니었다'며 방송통신위원회의 시정명령, 과징금 등의 처분을 모두 취소하라고 1심 판결을 내린 겁니다.
앞서 페이스북은 '정당한 사유 없이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접속경로를 변경해 국내 인터넷 망 접속 속도를 떨어뜨려 이용자 피해를 초래했다'는 이유로 방송통신위원회의 과징금 처분을 받은 뒤 부당하다는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번 판결에 대한 반응은 엇갈립니다. 인터넷 서비스 제공 사업자(ISP)인 SK텔레콤(SK브로드밴드), KT, LG유플러스 등 통신사는 부정적인 반응이고 네이버와 카카오 등 콘텐츠 사업자(CP)는 내심 환영의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터넷 품질에 대한 책임은 CP가 아니라 ISP에 있다는 판결인데다, 논란을 파고 들어가보면 '망 중립성 원칙'과도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인듯 합니다.
망 중립성 원칙은 ISP가 자사망을 이용하는 콘텐츠나 서비스를 차단하거나 느리게 만드는 등 차별해선 안 된다는 개념인데요.
소송을 당한 방통위를 비롯해 당사자인 통신업계 입장에선 충격이 큽니다.
이번 사안은 망 중립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봤던 ISP가 아니라 오히려 CP인 페이스북이 인터넷 접속경로를 변경해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가입자의 페이스북 접속 지연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즉 힘의 균형이 ISP가 아닌 CP로 옮겨간 상황에서, 글로벌 플랫폼의 힘을 과시한 사례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페이스북은 법원에 접속경로를 변경한 이유에 대해 '2016년 1월 전기통신설비의 상호접속기준이 개정됨에 따라 KT가 과다한 접속료를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는데요.
지난 2분기 매출만 20조원이 훌쩍 넘는 페이스북이 정말 돈이 없어서 과도한 접속료를 탓했을까요. 전세계 월 사용자 수가 23억명에 달하는 페이스북은 '작은' 한국 시장의 서비스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어서일까요.
페이스북의 국내 월 이용자는 약 1800만명, 자회사인 인스타그램도 1000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23억명을 거느린 페이스북 입장에서 한국은 수많은 시장 중 하나 정도일 수 있으나,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습니다.
국내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자신의 신상, 의견을 밝힐 때 주로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인터넷에 사진을 올릴 때 'OO스타그램'과 같은 말을 흔히 쓰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페이스북 서비스들은 대중적이고 일상의 미디어입니다.
그러니 페이스북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에선 '접속과 관련 사용자 불만이 폭주하고 ISP가 욕을 먹으면 접속료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ICT 업계는 경험이 있습니다.
2011~2012년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이 문자 메시지 시장 잠식에 이어 '보이스톡'이라는 모바일 인터넷전화(mVolP) 서비스를 내놓자 이동통신사들은 '우리가 구축한 망에 카카오톡이 무임승차한다'며 적극적인 견제에 나선 바 있는데요.
이때 여론은 카카오톡 편이었습니다. 카톡은 이용자의 응원과 함께 브랜드 힘을 더욱 키워 국민 모바일 메신저의 반열에 올랐고, 이통사들은 욕을 먹기 바빴을 정도입니다.
7~8년이 흐른 현재도 망을 둘러싼 의견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페이스북 판결과 관련 재판부는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정보가 유통되게 하는 CP의 역할이 중요하므로 명확한 규정이 없는 이상 이에 대한 제재도 신중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등 망중립성의 원칙이 논의될 때 CP 입장에서 사용되는 논거도 제시했습니다.
한국이 여전히 망중립성 원칙을 지키고 있으므로 이론적으로 맞는 말 입니다.
그런데 이런 잣대를 인터넷 플랫폼 역시 콘텐츠나 서비스를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플랫폼 중립성'이란 개념으로 적용하면, 페이스북은 의도가 어쨌든 일부 통신사 이용자를 차별하게 된 행위를 하게 된 셈이기도 합니다.
이번 판결에서도 페이스북의 월 이용자수는 접속경로 변경 전후로 1200만명 수준에서 소폭 증가한 사실이 적시됐습니다. 접속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쓰겠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페이스북은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나아가 망 중립성과 관련해선 시장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는 지적도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2011~2012년 망 중립성이 논의될 때만 해도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같은 글로벌 플랫폼의 국내 영향력은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드린대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고, 유튜브는 동영상을 넘어 국내 포털 네이버가 잡고 있던 검색 기능까지 위협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번 판결에 따라 글로벌 사업자들이 자사가 확보한 많은 이용자를 무기로 망 사업자와의 힘 대결에 나설 것이란 우려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페이스북의 행동에 조치를 하려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CP가 지닌 가치를 억압하는 일은 없어야겠죠. 네이버나 카카오 보다 작은 회사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방향도 곤란합니다.
달라진 환경을 고려하는 한편 적어도 글로벌 사업자에 의해 국내 이용자 피해가 발생했을 때 제재하고 시정할 수 있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망 사용료를 거의 안 내는 글로벌 기업과 국내 기업 간 역차별 문제도 해소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고요.
방통위는 페이스북 판결 이후인 지난 23일 개최한 전체회의에서 "제도적 미비점 보완 등 방통위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며 항소와 제도 개선에 대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