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개월째 답보 상태였던 가상자산법이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다. 매번 다른 안건에 밀렸지만 이번에는 순서까지 바꾸며 심사를 서둘렀다. 굵직한 사건·사고가 잇달아 터지고 피해자가 늘면서 정치권이 성난 민심을 서둘러 잠재우기 위한 의도로 파악된다.
'만년 뒷순위' 가상자산법, 이번엔 달랐다
지난 25일 오전 10시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에서는 가상자산과 관련된 법안을 집중적으로 심사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낸 '가상자산산업기본법안'을 비롯한 19개 법안을 일괄 폐기하고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을 위한 법안(이하 가상자산법)'을 의결했다.
당초 심사순서는 선불전자지급수단 발행자 등록대상을 확대하는 내용이 담긴 '전자금융거래법 일부개정법률안' 등이 먼저였다. 그러나 이날 정무위는 가상자산법을 먼저 심사했다.
오전에는 법안 중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와 가상자산위원회 설립, 한국은행의 가상자자산사업자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권 등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오후 3시에 재개 후 1시간 만인 오후 4시에 법안을 의결했다.
속전속결로 진행된 이날과 달리 그동안 정무위는 가상자산 관련 법안을 번번이 '패싱'했다. 큰 틀에서 여야 간 이견이 없어 금방 통과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매번 정쟁과 현안 법안에 밀렸다.
지난해 11월 심사소위에 법안이 상정됐지만 예산안을 둘러싸고 여야 간 대치가 길어지면서 논의 자체가 불발됐다. 정쟁으로 바로 앞 차례에서 논의가 끊기거나, 후순위인 법안을 먼저 심사하기도 했다.
상장·발행 기준 빠졌지만…토대 마련에 의의
정무위가 가상자산법을 서둘러 심사한 이유는 투자자 보호가 시급하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 'P코인'을 둘러싼 강남 납치·살해 사건, 거래소 뒷돈 상장 사건,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구속 등의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투자자 보호를 강화한 법 제정 목소리가 커졌다.
단 이번에 의결된 가상자산법은 어디까지나 이용자 보호, 시세조종을 비롯한 불공정거래행위 규제에 중점을 둔 법안이다. 가상자산의 증권성 판단, 발행·공시·상장 기준은 제외됐다. 가상자산법이 제정된다고 해도 부실한 가상자산의 상장을 규제하거나, 가상자산의 증권 여부를 판단할 방법은 없는 셈이다.
이는 가상자산시장 규제 공백을 줄이기 위해 단계적으로 입법을 추진한 데 따른 것이다. 가상자산은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거래되는 특성상 국제적 공조가 필수적이다. 금융당국과 국회는 발행, 공시, 상장 기준을 법안에 포함하기 위해서는 가상자산의 국제 기준이 먼저 가시화되어야 한다.
이에 국회는 투자자보호를 위한 법안을 만들어 단계적으로 입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완벽한 단일 법안을 만들기보다 합의 가능한 부분을 반영한 1단계 법안을 만든 뒤 보완하는 방식이다. 국회 관계자에 따르면 정무위는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의 가상자산 법안을 살펴보고 공청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가상자산 발행 기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준비금 의무화 등이 담긴 유럽연합의 가상자산 규제 법안인 미카(MiCA)는 지난 20일 통과됐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가상자산을 증권과 상품으로 규정해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관할하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그러나 최근 가장 큰 화두가 된 가상자산의 증권성 판단 기준은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가상자산 거래소 비트렉스를 증권거래소법 위반으로 기소했는데, 증권성 판단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주요 증권성 판단 기준이 될 리플과 SEC의 소송 결과도 늦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