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 날씨 덕분에
이른 꽃소식이 전해진다.
살랑거리는 봄바람 따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픈
마음이 한가득 찾아든다.
덕수궁 돌담길엔
노랗게 핀 개나리들이
줄지어 봄볕을 즐기고 있다.
누군가 찾아올 것만 같은
그런 봄날이다.
봄바람을 타고 저 멀리
스위스 융프라우를 여행 중인
친구에게 엽서 한 장이 도착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 우표를 사고
그 사람을 생각하며 쓴 엽서 한 장
정성스레 한자한자 눌러쓴 글씨엔
그 사람의 향기가 묻어난다.
실시간 문자나 메신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글씨에 묻어난
그 사람만의 필체 때문일 것이다.
이재득 씨는 일주일에 한번
훈민정필 부천교육원에서
글씨 교정을 받고 있다.
손글씨를 쓸 일이 없는 요즘
글씨 교정을 받는 이유가 뭘까.
"1년째 수업을 받고 있는데
제가 워낙 악필이라 어릴 때부터
잠재된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업무야 모두 컴퓨터로 작업하니까
글자를 직접 쓸 일은 없지만
글씨체는 꼭 바꾸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에 계기가 있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친구와 연애를 하면서도
한 번도 자필로 편지 써준 적이 없어요.
악필이라 두려움이 컸던 것 같아요.
늘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았죠.
그런데 막상 글씨를 배우고 나니
손편지를 전할 여친은 없어졌네요.
그래도 잘 배워두면 언제가는
곱게 손편지를 써서 전달할
기회가 찾아오겠지요.
제 자신의 노력에 따라
글씨체가 하루하루 달라지면서
자신감도 많이 생겼습니다.
마음의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점점 아름다워지는 느낌입니다."
글씨는 그 글씨를 보는 이에게
갖출 수 있는 기본적인 예의라고
훈필정필 송병훈 대표는 말한다.
중국 북경 중앙미술대학원에서
미술사계 문학을 전공한 송 대표는
활발한 켈리그라피 활동으로
여러 광고에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바르게 쓰는 법을 연구하고
글씨 교정 특허까지 출원했다.
아름다운 글 한글을
바르게 쓰는 법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자 직접 나섰다.
그렇다면 송 대표가 개발한
바르게 글씨 쓰는 법은 뭘까.
"글씨 쓰는 법을 연구하던 중
한글의 구조적 특징을 잡아냈어요.
모음 위치에 따라 자음 모양이 다르고
초성, 중성 혹은 초성, 중성, 종성 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위치하는 거죠.
한글의 구조적 특징을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교본으로 만들었죠."
훈민정필 신한희 원장은 글씨 교정에다
인문학적 감성을 더해 수업을 진행한다.
"계속 글씨만 교정하다 보면
많이 지루할 수 있잖아요.
좋은 책이나 글을 쓰면서
그 내용도 같이 나누고 글을 쓰다 보면
글의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습관적으로 쓰지 않고
정성스레 연습하게 되는 장점이 있어요.
초등학생부터 70대 어르신까지
수업에 참여하는 연령대가 다양해요.
가령 사업하는 분들은 단 하나
계약서 이름 석 자를 쓰기 위해
글씨를 배우는 분도 계세요.
기술적인 교정법을 알려드리지만
개인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악필은 형태와 균형이
모두 좋지 않다고 볼 수 있어요.
글씨는 보통 그 사람을 나타냅니다.
물론 절대적이진 않지만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산만하거나
불안정하면 글씨가 날리거나 흔들려요.
우리는 이미 형태와 균형에 맞춰
글씨 쓰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이를 잘 따르지 않다 보니
악필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기술적인 부분을 반복해
습득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어요.
일반 사회생활에선 글씨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학교에선 조금 달라요.
객관식에서 서술형으로
시험 방식이 바뀌는 추세여서
글씨에 대한 중요성이
조금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글씨가 채점 항목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글자가 잘 정돈되면
내용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르신들도 많이 오시는데
그분들은 문해교육을 같이 합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에게
글씨를 쓴다는 건 두려움이거든요.
자존감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아요.
가령 은행에서 서류를 작성할 때
잘 쓰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문해교육을 받으시고 나면
자신감은 물론 대필도 해준다고 해요.
그땐 뿌듯한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죠.
사실 저도 그분들을 가르치기 전엔
힘들어하는 부분을 잘 몰랐어요.
글자를 제대로 못 쓰는 분들에겐
아픔이고 자존감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된 거죠."
"디지털 시대
세상은 더 편리해지고 있지만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글씨는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프린트한 글씨와 손글씨는
느낌부터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손글씨가 주는 감성은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잖아요.
바로 그 사람의 향기가
그 글씨에 묻어나기 때문이죠.
먼 미래에도 손 글씨가
사라지지 않을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봄날
택배 대신 편지 한 통을 받고
바스락거리는 편지지를 꺼내
그 글씨로 그 사람을 만나면서
눈으로 또 가슴으로 읽는 편지
그 한 장의 기쁨을 위해
꽃향기와 함께 봄바람에 실어
손편지 한 장 선물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