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는 양형기준이라는 게 있다. 판사가 죄를 판단할 때 주관적인 면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법원이 외부 인사들과 함께 만드는 일종의 '선고 가이드라인'이다. 과거 대기업 총수들의 범죄에 대해서 법원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관행을 암묵적으로 적용했다. 징역 3년을 초과하면 구치소에 수감되지 않는 집행유예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경제민주화 바람으로 재벌들 탐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배임·횡령 등 경제범죄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문제삼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법원의 양형기준은 더 엄격하게 바뀌었다. 300억원 이상의 횡령·배임죄의 경우 양형기준은 징역 4~5년 이상을 선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 양형기준이 사실상 처음 적용된 판결이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에게 내려진 징역 4년 6월이었다.
◇ 법원 '母子 동시 구속'
지난 2011년 2월 검찰은 1400억원대의 횡령·배임을 저지른 혐의로 태광산업 전 이호진 회장에 대해 구속 기소, 모친인 이선애 전 상무는 불구속 기소했다. 1년 만인 2012년 2월 1심 선고에서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는 이 전 회장에게는 징역 4년 6월과 벌금 20억원을, 이 전 상무에게 징역 4년과 벌금 20억원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이 2011년 1월 2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부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
이 전 상무가 83세의 고령인데다, 대기업 판결에서 모자가 동시에 구속된 전례가 없던 터라 법원의 이같은 결정은 재계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두 사람 모두에게 집행유예가 불가능한 징역 4년 이상이 언도된 점 역시 대기업 오너 범죄에 대한 법원의 냉랭한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의 혐의 사실을 대부분 인정하면서 "간암수술로 인해 이 전 회장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며 형량을 줄여달라고 주장하나 건강상 이유로 양형기준을 이탈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못박았다. 이 전 회장은 구속집행 정지 상태에서 링거를 꽂은 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나온 터였다.
재판부는 특히 이 전 상무에 대해서는 '주범'이라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재판부는 "이 전 상무는 고령이고 자신의 범행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한다"며 "그러나 각종 범행을 지시한 이 전 상무는 최근까지도 일가의 재산을 주도적으로 지배한 점이 인정돼 구속한다"고 법정구속 이유를 설명했다.
이 전 회장은 선고공판을 앞두고 태광산업과 대한화섬 대표이사, 티브로드홀딩스 등 계열사 사내이사를 포함한 모든 자리에서도 사퇴하며 법원의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 전 회장 모자는 2심에서도 1심과 같은 판결을 받았고, 이 전 회장은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이 전 상무는 상고를 포기했다. 두 사람 모두 구속집행정지를 여러 차례 연장했으며, 이 전 회장은 질병을 이유로 보석 허가를 받았다.
◇ 세금 소송도 패소
이 전 회장은 지난해 세금 소송까지 패소해 거액의 세금을 내게 됐다. 선대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차명주식을 그대로 관리하다 458억원의 세금 폭탄을 맞은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는 이 전 회장이 강남세무서 등 15개 세무서를 상대로 낸 증여세 부과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전 회장이 기존에 명의신탁된 주식을 상속으로 취득했음에도 명의개서를 하지 않았다. 이에 증여세를 부과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이 전 회장은 부친인 고 이임용 회장의 태광산업 주식 13만여주를 차명주식으로 상속했지만 명의개서하지 않고 그대로 차명으로 관리했고, 강남세무서 등은 이 회장이 명의신탁자들에게 주식을 증여한 것으로 보고 증여세 458억4600여만원을 부과했었다.
◇ 상속 소송까지…'오너 리스크' 심각
지난 2012년에는 상속 분쟁까지 불거졌다. 이 전 회장의 이복 형 유진씨가 "차명으로 숨겨뒀던 선대 재산에 대한 상속분을 달라"며 이 전 회장과 이 전 상무를 상대로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내면서 상속 분쟁에 휩싸였다. 유진씨는 친자확인 소송 끝에 상속회복 청구 소송을 제기해 2005년 135억여원의 상속을 뒤늦게 받았다. 하지만 유진씨는 이후 태광그룹에 대한 세무조사와 검찰의 수사를 통해 차명주식 등 상속에서 제외됐던 재산이 드러난 만큼 이 부분에 대한 상속분을 다시 나눠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유진씨에 앞서 이 전 회장의 누나인 재훈씨도 같은 이유로 70억원 대의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내우외환에 빠진 태광그룹은 다른 대기업집단 보다 '오너 리스크'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주력 계열사인 태광산업은 2012년 11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2001년 적자가 장기 파업에서 발생한 것을 감안하면 영업적자는 1950년 설립 이후 사실상 처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