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수백 명의 목숨을 조용히 앗아간 화학 대참사였습니다.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있었지만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제품을 판매한 회사들의 부주의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다방면으로 책임론이 불거졌는데요. 국민연금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판매한 회사에 투자를 해 질타를 받은 것이죠. 국민으로부터 보험료를 받아 기금을 운영하는 곳이 국민 인체에 유해한 제품을 파는 기업에 투자를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이냐는 논란이 일어난 겁니다.
국민연금이 논란에 휩싸인건 책임투자를 제대로 하고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단순히 기업의 재무적 성과만 바라보고 투자하는 것이 아닌 기업이 제대로 된 제품을 판매하는지,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지 등 비재무적 요소들까지 함께 고려해 투자하는 것을 책임투자라고 합니다.
이미 해외에서는 책임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글로벌지속가능투자연합(GSIA)이 발간한 '세계지속투자리뷰2018'(Global Sustainable Investment Review2018)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 세계 사회책임투자자산은 30조달러(약 3경5000조원)를 넘어섰습니다.
반면 국내에서 가장 많은 투자자산을 확보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지난해 책임투자규모는 26조74000억원입니다. 달러로 환산하면 약 300억달러 수준입니다. 지난해 기준 2조1800억달러(2600조원)의 책임투자규모를 기록한 일본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규모입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 이후 국회에서는 책임투자를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법안들이 등장했습니다. 20대 국회에서 책임투자 내용을 담은 법안만 8건이 발의됐습니다.
투자행위는 국민연금·사학연금과 같은 연기금뿐만 아니라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 민간기업까지 다양한 주체들이 할 수 있는데요. 그렇다보니 책임투자를 담은 법안도 저마다 다양합니다. 현재 국가재정법,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이하 자본시장법), 한국수출입은행법, 한국산업은행법에 책임투자를 담은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발의된 법안은 지난 2016년 8월 홍일표 자유한국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입니다. 이 법안은 기업들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하는 사업보고서에 회사의 환경 및 인권 문제, 부패 근절에 관한 계획과 노력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정보를 기재하도록 했습니다.
이언주 무소속 의원(2016년 9월)과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2017년 4월)도 책임투자를 담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법안마다 기재해야 하는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기업환경, 노사관계, 사회공헌 등 기업의 사회책임을 평가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담았습니다.
국가재정법에도 책임투자관련 규정을 담은 개정안이 발의됐습니다. 국가재정법은 국가가 특정 목적을 위해 자금을 운용하는 기금에 대해 규정하는 법인데요.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등 각종 연기금이 해당 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2016년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가재정법에는 기금관리주체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기금의 수익 증대를 위해 환경·사회·지배구조를 고려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를 고려한 책임투자조항을 신설한 겁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최운열, 이원욱 의원이 발의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좀 더 강하고 구체적인 책임투자 내용을 담았는데요. 최운열 의원안은 기금관리주체가 기금운용 과정에서 ESG요소를 반드시 고려하도록 했습니다. 이원욱 의원안도 ESG요소를 반드시 고려하고 만약 고려하지 않은 경우엔 그 이유를 공시하도록 했습니다.
2017년 5월 조배숙 민주평화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한국수출입은행법과 한국산업은행법 개정안은 각각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자금공급이 필요한 분야에 투자할 때 반드시 ESG요소를 고려하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책임투자를 강화하기 위한 법안들은 발의가 됐지만 문제는 국회에서의 논의가 지지부진하다는 점입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우리나라에서 온전하게 자발적으로 책임투자를 이행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지 회의적"이라며 "법이 만능은 아니지만 책임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