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가(家)'에서 10여 년 만에 벌어진 경영권 분쟁 사태가 회사의 승리로 끝났다. 지난 26일 열린 금호석유화학 주주총회에서 회사가 상정한 안건 대부분은 주주제안을 압도했다. 이번 분쟁은 지난 1월 말 박철완 금호석유화학 상무가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의 경영권에 도전하는 공시를 내면서 시작됐다. 박 상무는 박찬구 회장의 조카다.
분쟁 시작 이후 박철완 상무는 회사 경영 전반을 지적하며 목소리를 냈다. 금호리조트 인수 추진은 부적절하고 경영진이 주주가치 훼손행위를 해왔으니 이를 견제해 회사 경영을 개선하고 주주가치도 제고하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보통주 1주당 1만1000원, 우선주는 1주당 1만1100원을 배당하는 주주제안을 제시했다.
2009년 '형제의 난'의 경험 덕일까,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숙질의 난'에서 노련하게 대응했다. 금호석화는 박 상무의 어설픔과 의도를 지적했다. 금호석유화학 정관상 우선주는 액면가 5000원의 1%인 50원을 차등 배당해야 하므로 박 상무의 요구에 50원의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경영권을 장악하려는 박 상무의 역량에 흠집을 내는 노림수였다.
노동조합은 기존 경영진 편이었다. 노조는 박 상무가 형제의 난 당시 박삼구 전 회장 편에 섰으면서 갑자기 경영권을 노리는 것은 사리사욕을 취하려는 행보에 불과하다고 했다. 박 상무는 모친과 장인이 금호석화 지분 매입에 나서는 모습을 보며주는 등 아군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다만 해당 지분은 이번 주총 표결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이때만 해도 팽팽했다는 평가다. 그런데 금호석화 지분 8.25%를 가진 국민연금이 박찬구 회장 손을 들어줬다. 사실상 캐스팅보터였던 국민연금은 경영권 안정에 무게 중심을 둔 것이다. 결과는 앞서 언급한대로다. 박 회장은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는 안건을 제외하고 재무제표·이익배당·정관 변경·사내외 이사 선임·이사 보수한도 등의 안건에서 모두 이겼다.
이번 경영권 분쟁을 거치면서 박 회장은 소중한 자산을 쌓았다. 무엇보다 지지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다는 점이 크다. 우선,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의 지지를 확인했다. 노조의 지지도 얻었다.
특히 국민연금의 지지를 얻은 점은 '반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크게 다가온다. 국민연금은 박찬구 회장을 과거 부정적으로 봤는데, 이번에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국민연금은 2019년 금호석화 주총에서 박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을 반대하면서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권익 침해의 이력이 있다"고 지적했고, 2016년 주총에서도 "기업가치 훼손 이력과 과도한 겸임"을 이유로 박 회장 등 사내이사 재선임을 반대했다.
게다가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는 안건은 오히려 부결되면서 박 상무 같은 세력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된 점도 소득이다. 금호석화는 박 회장이 대표이사이고 이사회 의장도 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 상무는 패배만 한 것일까. 그는 크게 두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존재감과 가능성이다. 박 상무는 아버지 고 박정구 금호그룹 회장의 2002년 별세 이후 이렇다 할 존재감을 재계에 보이지 못했다. 최대주주임에도 금호석화 곳곳의 경영권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박 회장 자녀들에게도 인사상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 경영권 분쟁을 벌이면서 존재감을 크게 드러냈다. 세계 2위 의결권 자문사인 글래스루이스와 미국 최대 공적연금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 세계 최대 국부펀드 노르웨이 중앙은행 투자관리청이 그의 손을 들어줄 정도였다. 국민연금도 박 상무의 사내이사 선임에는 찬성했다.
이런 까닭에 최대 승부처였던 박 상무의 사내이사 선임안은 비록 부결됐으나 52.7%의 표를 얻으면서 사측이 제안한 백종훈 전무(64%)를 바짝 추격했다.
박 상무 주변 세력도 만만찮음이 확인됐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인맥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등에서 경력을 쌓은 주변 인물들이 사외이사 후보로 이름을 올렸고, 장인인 허경수 코스모그룹 회장도 지분을 사면서 우호 세력임을 확인해줬다. 허 회장은 허신구 GS리테일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누나들도 대우그룹, 한국철강, 일진그룹 아들들과 혼인했으니 지원군은 더 있을 수 있다.
게다가 현금도 두둑이 챙길 전망이다. 그가 제안한 과감한 배당 상향안 덕에 금호석화도 배당금을 대폭 올렸기 때문이다. 작년 최대주주 배당금은 주당 1350원이었는데, 이번엔 4000원이다. 박 상무는 보유 주식 305만6332주를 기준으로 약 122억원을 챙길 수 있다. 앞으로 이른바 전투자금이 될 수도 있다. 이번 대결에서 활용했듯 법무법인, 홍보 에이전시, 홈페이지 운영에 쓰는 돈 말이다.
그러나 이쯤하면 박 상무는 능력과 경험, 자본, 주변 인재들과 함께 다른 길을 가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박 상무는 2025년 금호석화 시가총액을 20조원으로 올려놓겠다고 했는데, 박 상무와 유사하게 하버드와 BCG를 경험한 김범석 쿠팡 창업자는 자신 회사를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해 시총 100조원을 달성했다.
현재 금호석화는 박 상무가 없어도 특별한 문제가 없는 회사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회사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배 이상 증가한 7421억원에 달했고 매출액도 4조8095억원을 찍었다. 오는 2025년 매출액 목표치는 무려 9조원이다. 또한 금호석화는 시장을 설득할 수 있는 실적 개선과 주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지배구조 개선으로 박 상무의 도전에 계속 맞설 것으로 관측된다.
박 상무가 지적하듯 회사 지배구조, 이사회의 독립성 같은 것이 문제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주주들로부터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받은 게 현실이다. 반대로 박 상무가 금호석화에서 보였거나 보일 수 있는 성과는 많지 않다.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그가 회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