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자국화'에 속도를 내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향한 투자 압박 수위도 한층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파운드리와 후공정을 넘어 메모리 전공정 생산시설까지 자국에 유치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양사는 용인·서남권 초대형 반도체 투자와 미국의 추가 투자 요구를 동시에 마주하게 됐습니다.
AI 메모리 공급난이 이어지면서 증설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됐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새 팹을 지으면 천문학적인 비용과 인력 부담을 떠안아야 하고, 국내 투자 일정과 반도체 생태계까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국내 생산기반을 지키면서 미국의 요구에 어디까지 응할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미국의 '새 청구서'
미국이 한국 반도체 기업에 또 하나의 투자 청구서를 내밀었습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최근 미국 뉴욕주 클레이타운에서 열린 마이크론 반도체 공장 콘크리트 타설 행사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며 "마이크론이 앞장서면 경쟁사들도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이크론을 앞세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까지 미국 생산 경쟁에 끌어들이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은 건데요.
발언 시점도 공교롭습니다. SK하이닉스가 나스닥 ADR 상장을 통해 미국 자본시장에 입성하기 불과 하루 전이었죠. 글로벌 투자자들로부터 약 40조원을 조달한 SK하이닉스를 향해 '미국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 만큼 미국 생산도 늘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옵니다.
러트닉 장관의 발언은 단순 투자 유치를 넘어 미국의 반도체 전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40%를 미국에서 담당한다'는 목표 아래 관세·보조금·투자 인센티브 등을 앞세워 글로벌 공급망을 미국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대만 TSMC가 미국 투자 규모를 1650억달러까지 늘리고 애플도 대규모 미국 제조 프로그램을 내놓은 데 이어 이제는 AI 시대 핵심 부품인 메모리 생산기지까지 미국으로 옮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겁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미국에 생산시설을 짓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고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HBM 첨단 패키징 공장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다만 두 회사 모두 미국 내 메모리 전공정 생산기지는 아직 없습니다.
때문에 러트닉 장관의 이번 발언은 'D램 등 메모리 전공정 팹까지 현지에 세워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미 유치한 파운드리와 패키징을 넘어 한국이 주도해 온 메모리 전공정까지 자국 안에 들이겠다는 요구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미국은 반도체 제조 기반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파운드리에 이어 메모리 생산능력까지 확보하려는 것"이라며 "최근 HBM 공급 부족이 심화한 만큼 미국 정부와 빅테크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AI 메모리 공급망을 자국 내에 구축하려는 요구가 더 거세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HBM은 GPU와 한 몸처럼 작동하며 AI 연산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라며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메모리·대만의 파운드리에 의존하는 현재 공급망 자체가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적 리스크"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AI 시대에는 생산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곧 기술 패권을 확보하는 것"이라며 "미국이 설계·파운드리·메모리·패키징까지 모두 자국 안에 두는 '완결형 AI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메가프로젝트 덮친 美 변수
문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미 국내에서도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 계획을 확정했다는 점입니다. 삼성전자는 용인 국가산업단지 첫 팹의 가동 시점을 당초보다 1~2년 앞당겨 2029년부터 양산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부와 함께 서남권을 용인에 이은 제2 반도체 생산거점으로 육성하는 메가프로젝트도 본격화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서남권에만 총 800조원을 투자해 메모리 팹 4기와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계획입니다. 용인·평택·청주에 이어 서남권까지 생산거점을 확대하면서 국내 반도체 투자 규모는 수천조원대로 불어났습니다.
SK하이닉스도 용인 1기 팹과 청주 P&T7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최근 나스닥 ADR 상장으로 조달한 약 40조원도 용인과 청주 생산시설 확대에 우선 투입할 계획입니다.
다만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조건이 맞는다면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 어디든 생산시설을 검토할 수 있다"며 미국 내 메모리 공장 건설 가능성을 열어뒀는데요. AI 메모리 수요가 공급을 크게 웃도는 만큼 추가 생산능력 확보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입니다.
메모리 업체들도 공급 부족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 회장은 "수요가 공급을 훨씬 빠른 속도로 앞지르고 있다"며 메모리 산업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경기순환 구조로만 움직이지 않는다고 진단했습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도 내년을 '업계 역사상 가장 공급이 어려운 해'로 전망하며 생산능력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대규모 메모리 공장을 새로 짓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미국은 인건비와 건설비가 국내보다 훨씬 높고 소재·부품·장비 공급망도 한국만큼 촘촘하지 않습니다. 같은 규모의 팹이라도 투자비와 운영비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데다, 보조금 수령 과정에서 영업비밀 제공이나 초과이익 환수 등 규제 부담도 감수해야 합니다.
김 교수는 "미국에 메모리 전공정 팹을 추가로 건설할 경우 가장 큰 부담은 천문학적인 투자 비용과 인력 확보 문제"라며 "공장 건설비는 한국보다 최소 30%, 많게는 50% 이상 높고 숙련 엔지니어도 부족해 원가 경쟁력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국내와 미국에서 초대형 투자를 동시에 추진하면 국내 투자 일정이 늦어지는 '밀어내기(Crowding Out)' 효과도 불가피하다"며 "기업의 재무 부담은 물론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 잡고 한국도 지키는 법
반면 미국 현지 생산이 부담만 안기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 교수는 "HBM과 첨단 메모리는 고객 맞춤형 제품인 만큼 미국 빅테크와 가까운 곳에서 안정적으로 공급하면 장기 계약을 확보하기 쉽고 매출과 수익도 보다 예측 가능해진다"며 "이를 바탕으로 추가 투자 계획을 세우는 데도 유리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민은 '투자 우선순위'입니다. 미국 정부의 요구를 외면하기도 어렵지만 국내 초대형 반도체 프로젝트도 예정대로 추진해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투자의 중심축은 한국에 두되 미국에는 고객 대응과 통상 리스크 관리에 필요한 생산기지만 선별적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김 교수는 "미국의 요구를 전면 거부할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수용할 수도 없는 외통수에 놓여 있다"며 "당장 메모리 전공정 팹을 짓기보다 한국에서 생산한 웨이퍼를 미국 현지 패키징 공장에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협상의 시간을 버는 '단계적 현지화' 전략이 현실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미국이 끝내 전공정 투자까지 요구한다면 마이크론에 준하는 보조금·세제 혜택·미국 빅테크와의 장기 공급계약 등 수익성을 담보할 장치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미국 투자가 늘더라도 핵심 생산능력·최첨단 마더팹·연구개발(R&D) 거점까지 해외로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는 지적입니다.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고용과 부가가치를 지키려면 한국을 주력 생산기지로 남기고 미국은 제한적인 현지 대응 거점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김 교수는 "전체 생산능력의 70~80%는 국내에 집중하고 미국은 20~30% 수준의 전략 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인 균형점"이라며 "정부도 용인 등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용수 인프라 구축과 투자 지원을 서둘러 기업들이 한국을 최우선 생산기지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