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들의 동침
서울지역 시내면세점 사업을 준비 중인 현대산업개발이 깜짝 발표를 했습니다. 면세점을 운영 중인 호텔신라와 손잡고 시내면세점 사업권 입찰경쟁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이를 위해 두 회사는 합작법인(HDC신라면세점)을 설립하기로 하고 4월7일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결합을 신고했습니다.
기업간 합종연횡이 드문 일은 아닙니다. 도로나 철도, 발전소 등 대규모 사업을 앞두고 컨소시엄을 구성해 경쟁에 뛰어드는 기업들을 종종 볼 수 있죠. 그런데 현대산업개발과 호텔신라의 합작은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돈이 되는 사업 앞에선 피보다 진한 게 재벌가(家)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입니다.
#2. 조카와 당숙의 대결
'현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현대산업개발은 현대가에 뿌리를 둔 기업입니다. 현재 회사를 이끌고 있는 정몽규(53)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부친이 고(故) 정세영 회장인데요. 현대자동차 설립자로서 '포니 정'이라는 별칭이 붙은 바로 그 분입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셋째 동생이죠.
현대가 중에는 시내면세점에 뛰어든 곳이 또 있습니다. 현대백화점그룹입니다. 얼마전 서울 강남에 있는 무역센터점 2개층을 면세점으로 꾸미겠다고 발표했죠. 현대백화점그룹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인 정지선(42) 회장이 이끌고 있습니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과는 5촌지간인데요. 결국 정지선 회장은 당숙과 시내면세점을 두고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3. 라이벌 된 사촌
삼성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범(汎) 삼성가인 신세계그룹은 시내면세점을 준비했습니다. 올해 초에는 인천공항면세점 사업권(DF7)도 따냈죠. 그런데 호텔신라가 현대산업개발과 손을 잡으면서 신세계그룹은 시내면세점 경쟁에서 강력한 라이벌을 상대하게 됐습니다.
신세계그룹은 이건희(73) 삼성그룹 회장의 동생인 이명희(71) 회장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지금은 이명희 회장의 아들인 정용진(46) 부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습니다. 호텔신라는 이부진(44) 사장이 최고경영자로 있는데요. 이건희 회장의 장녀이자 정용진 부회장의 외사촌입니다. 결국 이번 시내면세점 입찰에선 사촌이 동지가 아닌 적이 된 셈입니다.
#4. 가깝고도 먼 남매
현대가와 삼성가만 친인척끼리 경쟁하는 건 아닙니다. 롯데가도 비슷합니다.
서울시청 부근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시내면세점인 동화면세점과 면세점업계 1위인 롯데면세점(호텔롯데)이 서울광장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동화면세점 사장이 신격호(92)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막내동생인 신정희(68) 씨입니다. 동화면세점의 최대주주는 신정희 사장의 남편인 김기병(77) 롯데관광개발 회장이구요. 롯데관광개발과 호텔롯데는 '롯데' 상표를 두고 법적 다툼을 벌인 껄끄러운 과거도 안고 있습니다. 오빠와 동생은 가깝고도 먼 그런 사이였던 거죠.
또하나 재미있는 건 동화면세점 주주로 호텔롯데와 경쟁관계인 호텔신라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누가 말했을까요? '적의 적은 동지', '피보다 진한 건 돈'이라는 말들이 떠오릅니다. 현재 롯데면세점은 시내면세점 입찰에 뛰어드는 것을 검토중이라고 합니다.
▲ 동화면세점과 롯데면세점. 네이버 지도를 보면 총거리 730m, 걸어서 11분 거리에 있다. |
#5. 겉은 호텔, 속은 면세점
재벌들이 '피보다 진한' 면세점 경쟁을 벌이는 까닭은 이 시장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전국 43곳의 면세점 매출은 8조3000억원으로 전년대비 21.6% 증가했습니다. (2014년 면세점 매출액 국회보고)
면세점의 양대축을 이루는 호텔롯데와 호텔신라, 두 회사만 볼까요? 본업이 호텔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호텔롯데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호텔사업 비중은 10% 안팎에 불과합니다. 호텔롯데 매출의 85% 가량은 면세점에서 발생합니다. 호텔신라도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면세점 비중이 지난해 90%에 달했습니다.
#6. 요우커의 힘
특히 시내면세점은 인천공항면세점(평당 1억3500만원 이상)과 달리 임차료 부담이 덜한 데다, 중국인 관광객(요우커·遊客)이 많이 찾는 '알짜 중의 알짜'로 꼽힙니다. 이는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전체 외국인 방문객 10명 중 4명(43%)은 중국인입니다. 지난해 전체로는 중국인 613만명이 한국을 찾았습니다.(2014.12. 관광통계, 한국관광공사) 중국인 관광객 1인당 쇼핑지출액은 1431달러로 미국인(344달러)이나 일본인(340달러) 관광객의 4배가 넘습니다. 이런 '큰 손' 중국인 관광객 10명 중 6명(61%)이 찾는 곳이 시내면세점입니다.(2013 외래관광객 실태조사, 문화체육관광부)
그 덕에 지난해 시내면세점 매출은 약 5조4000억원으로 32.2% 늘었는데요. 전체 면세점 매출증가율(21.6%)를 크게 웃도는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재벌들이 시내면세점에 사활을 거는 이유, 짐작할 수 있겠죠?
#7. 하와이의 교훈
"니가 가라, 하와이"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에 나온 장동건의 유명한 대사입니다. 뜬금없이 웬 영화 이야기냐고요? 장동건과 유오성이 영화 속 조폭으로 그려진 1980년대만 해도 하와이는 일본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이 많이 찾는 국제적인 휴양관광지였습니다. 하와이가 거둔 관광수익 중 절반이 아시아인 방문객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영화 속 하와이가 괜히 나온 지명은 아니었던 거죠.
▲ 영화 <친구>의 한 장면. 준석(유오성)이 친구인 동수(장동건)에게 하와이로 갈 것을 권하자 동수는 "니가 가라, 하와이"라며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1980년대 하와이 경제는 일본인 관광객에 힘입어 큰 폭 성장했으나 이후 일본경기가 불황에 빠지면서 침체국면에 접어든다. |
하지만 하와이는 일본경제가 1980년대 중반 이후 장기불황에 빠지면서 동반침체에 빠집니다. 두자릿수를 기록하던 하와이 경제성장률은 1990년대 중반 마이너스로 곧두박질하고, 2%대의 실업률도 미국 전체 실업률을 웃도는 수준으로 치솟았습니다. 특정수요층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거품이 빠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가르쳐준 사례입니다.
전문가들은 시내면세점 경쟁을 보면서 하와이를 떠올리곤 합니다. 중국인 관광객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수록 그 위험성도 되새겨봐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장동건이 영화 친구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 기억하시죠?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 미국 전체와 하와이의 1인당 GDP성장률, 실업률을 비교한 그래프. 출처: 나이스신용평가 <호텔/면세점 업계 'China Boom'의 재고찰 - 기회와 위협의 이중주> 보고서. |
#8. 최종승자는?
관세청은 오는 6월1일까지 서울지역(3곳)과 제주지역(1곳)에 시내면세점 신청을 받습니다. 서울지역 시내면세점에 대한 허가는 15년만에 처음입니다. 이 가운데 2곳이 대기업에 돌아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결과는 7월이나 늦어도 8월초에 나옵니다. 그 전까지는 시내면세점을 노리는 재벌들 사이에 치열한 수싸움이 벌어지겠죠. 피보다 진한 경쟁에서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