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의 행보가 심상치 않습니다. 롯데는 재계에서도 보수적인 성향으로 유명합니다. 옥상옥 형태의 의사결정 구조에 위계질서를 중요시합니다. 그 탓에 늘 신사업 추진 시 기회를 놓치기 일쑤였습니다. 경쟁사들이 앞서갈 때 나중에 후회하는 일을 반복해왔던 롯데였습니다. 그럼에도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롯데는 늘 국내 최대 유통업체지만 덩치만 클 뿐 세세함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덩치만으로 밀어붙여 시장을 장악하는 패턴을 반복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런 점은 롯데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사석에서 만난 롯데 고위 관계자는 "변화에 대한 필요성은 늘 인지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다. 계열사별로 얽히고설킨 것들이 많아 고민이 많다"라고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롯데가 최근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작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입니다. 신 회장은 최근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 취임을 위해서입니다. 더불어 일본 롯데의 주요 주주들도 만나고 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을 다녀온 신 회장은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습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조치입니다. 그러다 최근 자가격리가 해제돼 현장에 복귀했습니다.
현장에 복귀한 신 회장은 임원회의를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비대면 회의나 보고가 생각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근무 환경 변화에 따라 일하는 방식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 업종별, 업무별로 이러한 근무 환경에서 어떻게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라고 화두를 던졌습니다. 본인이 직접 재택근무를 해보니 생각보다 괜찮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자 롯데그룹은 곧바로 재택근무 정례화 가능성을 타진했고 시행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에 따라 롯데그룹은 최근 롯데지주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주 1회 재택근무 실시를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롯데가 보여줬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의사결정은 물론 실행도 즉각적이었습니다. 롯데지주의 주 1회 재택근무 실시에 대해 재계 곳곳에서 "놀랍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입니다.
롯데그룹의 주 1회 재택근무 시행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현재 국내 대기업들은 포스트 코로나19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탓에 실적은 급락했고 일상 복귀가 늦어지면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된다고 해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분명 변화에 대한 수요는 있는데 방법을 모르니 난감할 따름입니다.
이런 상황에 롯데가 선도적으로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줬습니다. 혁신, 변화와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만 보였던 롯데가 먼저 나섰으니 재계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로써 롯데는 대기업 최초로 주 1회 재택근무를 정례화한 주인공이 됐습니다. 롯데의 이번 조치는 향후 국내 여러 기업들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롯데가 주 1회 재택근무를 전격 도입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현재 롯데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그 답이 있습니다. 현재 롯데는 주력사업들이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롯데를 지탱하는 양대 축인 유통과 화학부문 실적이 모두 부진합니다. 특히 유통부문의 실적은 더 안좋습니다. 최근 야심 차게 출범한 온라인 통합도 예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신 회장은 예전부터 변화와 혁신을 강조해왔습니다. 최근 수년간 경영권 분쟁을 겪으면서 롯데의 기업문화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던 게 사실입니다. 지난 2017년부터 롯데그룹이 시행하고 있는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 제도'가 대표적입니다. 수직적이며 보수적인 기업문화에서 벗어나 수평적이고 워라벨이 가능한 조직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신 회장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인습(因襲)'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그동안 롯데 내부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성과를 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 코로나19 사태까지 맞았으니 롯데로서도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 1회 재택근무 결정은 기존 롯데와는 분명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이번 조치는 롯데가 코로나19 확산이라는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너가 직접 나서 다음 스텝을 고민한 결과입니다. 물론 시행과정에서 오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가 정착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반적인 시스템을 재점검하고 그에 맞춰 시스템을 다시 세팅하면 됩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할 겁니다.
신 회장은 복귀와 동시에 현장을 찾았습니다. 주말을 이용해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과 롯데백화점, 롯데월드 어드벤처, 롯데마트 등을 차례로 방문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현장을 직접 둘러본 겁니다. 이제 오너가 현장을 찾는 것은 일상입니다. 하지만 이번 방문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귀국 후 첫 행보인데다 신 회장이 이후 어떤 전략을 내놓을지가 궁금해서입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롯데는 올해 계획해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유통 부문의 경우 점포 구조조정에 돌입한 상황입니다. 당초 2022년까지 200여 개의 점포를 정리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올해에만 120개 점포를 손보기로 했습니다.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기로 한 겁니다.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만큼 발 빠르게 대비하려는 전략인 셈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던 온라인 통합 모델인 '롯데ON'의 성공적인 론칭도 과제입니다. 온라인 강화는 신 회장이 각별히 신경을 쓰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코로나19 확산으로 소비자들의 온라인 경험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롯데ON의 성공 여부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여기에 호텔롯데 상장 등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들이 모두 코로나 사태 이전에 세워졌다는 점입니다. 신 회장이 주 1회 재택근무 시행이라는 변화를 준 것도, 코로나19 확산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현장을 직접 둘러본 것도 모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한 전략 수립을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이는 곧 환경이 급변한 만큼 지금까지 세워둔 계획들도 전면 수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롯데의 주 1회 재택근무 결정이 불러올 '나비효과'는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첫 단추부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염두에 둔 작은 변화를 준 만큼 이를 시작으로 향후 롯데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해야 할 듯 합니다. 신 회장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이번에는 정말 롯데가 변화를 주도하고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을까요? 일단 첫 시작은 좋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