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집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 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우마미'의 탄생
태초에 인간이 혀로 느낀 맛은 무궁무진했을 겁니다. 다만 그 맛을 표현할 길이 없었겠죠. 그러다 언어가 탄생하고 문자가 생기면서 맛을 규정하고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규정한 맛이 '단맛·짠맛·신맛·쓴맛' 이 네 가지입니다. 인간은 오랜 기간 이 네 가지 맛 이외의 맛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설사 처음으로 느껴본 맛이 있더라도 기본 네 가지 맛 중에서 몇 가지가 섞였겠거니 생각해왔습니다.
오랜 기간 네 가지 맛에만 집중해왔던 인류에게 새로운 맛이 등장합니다. '우마미(うま味(umami))'입니다. 네, 일본어입니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이 우마미를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감칠맛'입니다. 일본어라고 불편해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우마미는 영어사전에도 공식적으로 등록돼있는 단어입니다.
우마미는 1908년 처음 발견됐습니다. 꽤 오래됐죠. 당시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교) 화학과 교수였던 이케다 기쿠나에(池田菊苗)가 찾아냈습니다.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는 아내가 자주 해주던 두부요리를 먹다가 우마미 연구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의 아내는 다시마로 우린 물에 두부를 넣은 요리를 자주 했었는데요.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는 그 국물에서 나는 맛이 무척 궁금했다고 합니다.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는 국물 맛의 비밀을 찾기 위해 다시마를 대량으로 구매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이 우마미였습니다. 이 우마미의 성분이 바로 '글루탐산(glutamic acid)'입니다. 이 글루탐산은 물에 잘 녹지 않습니다. 글루탐산을 물에 쉽게 녹도록 나트륨을 붙인 것이 '글루탐산나트륨(monosodium glutamate)',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MSG'입니다.
'미원'의 모델 '아지노모토'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는 자신이 발명한 글루탐산나트륨의 제조 특허를 출원합니다. 이어 이를 사업화하기 위해 대량 생산할 곳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죠. 하지만 아무도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의 글루탐산나트륨을 생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물질'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미지의 영역이었던 만큼 사업가들은 선뜻 제품화를 위해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스즈키 사부로스케(鈴木 三郎助)'입니다. 당시 스즈키 사부로스케는 '스즈키 제약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스즈키 제약소에서는 다시마를 원료로 한 '요드'를 생산하고 있었죠. 그는 이 요드 사업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큰돈을 법니다. 이를 바탕으로 각종 화학 약품 원료의 제조·판매로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스즈키 사부로스케는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가 개발한 글루탐산나트륨이 자신들이 취급하고 있는 다시마에서 추출한 것임을 알고 그와 손을 잡습니다. 글루탐산나트륨이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현재 전 세계 조미료 시장을 휩쓸고 있는 '아지노모토(味の素·あじのもと·맛의 바탕)'입니다. 1909년 아지노모토는 출시와 동시에 대히트를 칩니다.
그동안 일본 국물 요리는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를 우려낸 국물이 베이스였습니다.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죠. 하지만 아지노모토가 출시되면서 이런 번거로움이 사라졌습니다. 어떤 국물이든 아지노모토만 들어가면 엄청난 맛을 냈기 때문입니다. 아지노모토가 성공하자 스즈키제약소는 스즈키상점을 거쳐 1946년 사명도 아예 아지노모토로 바꿨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보노 컵수프'가 아지노모토 제품입니다.
아지노모토, 조선을 삼키다
단기간 내에 일본 시장을 휩쓴 아지노모토는 이제 자연스럽게 눈을 당시 조선으로 돌립니다. 조선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물 요리가 식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이에 아지노모토는 1910년 일제 치하의 조선에 아지노모토를 출시합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총독부를 뒷배 삼아 대대적인 광고와 프로모션을 진행합니다.
아지노모토의 조선 시장 공략은 치밀했습니다. 당시 아지노모토는 거의 매일 신문과 잡지에 광고를 할 만큼 조선 시장 공략에 공을 들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무용가인 최승희를 모델로 기용하기도 했습니다. 아지노모토는 당시 최대 광고주였습니다. 심지어 1926년 열린 조선박람회에서는 ‘아지노모토 데이’를 열고 ‘무료 증정 상품권'을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광고의 한켠에는 조선 왕실에도 공급된다고 적어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판촉 인력을 동원해 아지노모토 입소문 내기에 주력했습니다. 음식점에 아지노모토와 경품을 제공하고 요리 강습회, 요리 책자 등을 동원한 판촉 등도 전방위로 벌였습니다. 아지노모토가 생소했던 조선 사람들은 계속되는 아지노모토의 물량 공세와 광고에 점차 익숙해졌죠. 게다가 직접 사용해보니 정말 쉽게 맛을 낼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큰 인기를 끕니다.
아지노모토는 또 조선인들이 냉면을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 '면미회(麵味會)'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면미회는 냉면집이 몰려있는 평양, 함흥, 원산 등 각 지역별로 냉면집 주인들을 모아 아지노모토를 제공하고 판촉하는 모임입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냉면에는 아지노모토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아지노모토의 이런 치밀한 전략 덕분이었을까요. 아지노모토는 1930년대부터 조선 사람들의 입맛을 완전히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2편에 계속